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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스토리]북한산 둘레길..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산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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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 '명상길' 초입. 이른 아침부터 절집의 스님은 월동준비하느라 망치질에 여념이 없다. 철늦은 망치소리가 까치소리와 어울려 겨울 산중을 더욱 적막하게 한다. 오르막 언덕길을 넘어서 평탄한 길에 이르러 할아버지 한분과 마주쳤다. 아주 느린 걸음이다. 목례를 건네자 미소로 화답한다. "어디까지 가세요 ?" "북악산 하늘길 입구까지 다녀와요. 청수장 근처 노인정에서 친구 만날 거요." 할아버지가 지나치고 미소의 여운이 막 가실 즈음 산 아래 연무에 갇힌 도시가 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금 저 풍진 세상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느라 대혼전이다. 서로 바꾸겠다고 하는 세상이 이 길을 걷는 사람 모두가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이다.

잊으려 했던 세상사가 머리속을 헝클었다. '오늘 하루 즐겁게 걷기나 하자.'그제사 명상길인 연유를 알 듯하다. 곧 솔향이 밀려든다. 다른 향내도 물씬하다. 도심 한 복판에서 맡을 수 없는 향기다. '꽃이 없는 겨울 숲 향기는 마른 낙엽의 소멸에서 오는 것일까 ?'' "왜 생로 병사 즉 '인생', '운명', '과정', '이뤄야할 지향 혹은 목표', '시간' '고난'도 '길'이라고 부르는 걸까 ?" 길이란 인마와 운송수단이 지나다니는 지표상의 공간만은 아닌게 분명하다.
우리는 수많은 표지판과 이정표를 따라 걷는 데 익숙하다.휴대폰, 컴퓨터 등등 문명의 한복판을 걸었고, 금융 위기 등 수많은 난관을 넘어왔다. 북한산에는 총 60여개의 공식적인 통로와 120여개의 비공식적인 통로가 있다. 북한산에는 사방에서 펼쳐진 통로들이 날줄과 씨줄로 엮여 거미줄같은 혈관을 이룬다. 등정,하산하는 방법은 사실상 '180 !(펙토리얼)이다. '180 ! ?' 그건 상상을 불허하는 숫자다. 천문학인 숫자의 길들은 하나같이 봉우리 혹은 고지대를 목표로 겨냥해 있다. 비록 그 길이 등고선을 따라 수평으로 형성돼 있다해도 등산을 위한 길이라는 점은 변할 수 없다.
 
북한산 길은 이제 둘레길 하나가 보태져 '180!+1'이 됐다. 여기서 '1'의 의미는 '180!'에 버금 간다. 또한 '1'은 모든 길을 수렴하고 포용한다. '북한산 둘레길'은 총 길이 71.8km로 북악산, 도봉산도 둥글게 감싸 안고 휘돈다.'둘레길'은 우리가 아는 길과는 다르다. 둘레길에 접근하는 방법 또한 헤아릴 수 없지만 길은 단 하나로 통한다.

길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보면 맨 처음 출발한 자리가 나오고, 또 다시 반복된다. 유일하게 수평으로 놓여 '윤회'를 반복하는 길' 둘레길의 의미가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 퍼포먼스가 늘상 길위에서 펼쳐진다. 지난해 둘레길을 찾은 사람들은 모두 260만 명이다. 올해는 지난 11월 현재 이미 '순례객'이 280만 명을 넘어섰다. '사람들의 둥근 행렬이 에워싼 산을 상상해보라.'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둘레길 하나로 북한산의 오랜 역사성을 더욱 인문화시켰다. 또 단순히 천혜적인 자연 환경물만은 아닌 북한산에 문화유산으로서의 품격을 더해준다.

그런 의미는 평창마을길에서 더욱 깊어진다.부자들이 사는 동네 '평창동' 을 걷다보면 미술관과 조형미 건축 작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절을 만날 수 있다.평창은 조선시대 도성을 경비하는 총융청의 군량창고가 소재한 데서 유래한다. 처음 평창 주민들은 주택가 한복판에 걷는 사람이 몰려들자 크게 반발했다.
구청엔 "지나는 사람마다 하도 들여다봐서 도무지 문조차 열 수 없다"는 항변이 쏟아졌다. 그러나 결국 순례객의 발길을 허용해가는 분위기다. 마침 주차장을 열고 김장하는 모습을 서슴없이 드러낸 가정도 보인다. '부자도 평범한 이들처럼 그저 그렇게 비슷한 행색으로 사는구나...' 매콤한 양념 가득 발라진 김장김치 한 입 얻어먹고 싶어졌다.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순례객이 한걸음 더 다가가고 싶어지면 부자들의 담장 높은 성채가 우리의 이웃마을이 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란 희망이 든다.

평창마을 조성은 1968년 청와대를 습격한 '1.21사건' 일명 '김신조사건'에서 연유한다. 당황한 정부가 서둘러 산촌 개발을 허용하고, 다시 억제하는 과정에서 지금의 평창마을이 만들어졌다. 평창마을길은 맨살의 흙과 나무숲을 드리운 명상길과는 달리 아스팔트로 덮혀 있어 걷는 정취가 덜하다. 그러나 연화정사에서 보는 전망은 명상길 그 이상이다. 석탑, 불상의 배후로 마을과 숲이 겹쳐지는 풍경은 감탄사를 절로 토하게 한다.

반면 옛성길은 등산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다지 어려운 길은 아니다. 옛성길의 백미는 탕춘대성 암문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아홉개의 봉우리들이다. 탕춘대성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의 외성으로 축조됐다. 잠시 성곽 위, 혹은 다시 흙길을 걷는다는 게 평창마을길과 다른 점이다. 옛성길 끝 구기터널 앞 장마공원에 이르면 칡즙, 군밤 파는 트럭을 만날 수 있다. 힘이 빠지고 목이 마른 장소에 꼭 알맞게 자리한 칡즙 트럭은 벌써 15년째 공원 어귀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 키우고 먹고 살 만큼 벌었어. 이젠 애들 다 컸으니 별 욕심 없어. 단골도 많어. 친구도 생겼고. 지금은 불경기여서 그런지 덜 팔리네."

단숨에 칡즙을 들이키자 트럭 아저씨는 한 잔을 더 내준다. 그의 온정에 몸의 피로가 녹는다. 덕분에 추억 한장이 아로새겨진다. 옛성길 끝 장미공원에 이르는 사람은 칡즙 트럭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칡즙의 온정이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지금 둘레길은 우리를 바꿔가고 있다. 둘레길은 산(山)문화를 고지대 등산 위주에서 수평적 탐방 형태로 변화시켰다. 힘 없는 노인들에게도 산의 접근권을 허락하고,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박진우 국립공원 관리공단 북한산 둘레길 운영단장은 "둘레길이 생긴 이후 산을 향유하는 개념과 인식이 달라졌다. 산은 오르는 게 아니라 걷는 곳이 됐다. 그동안 높은 산을 오를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북한산을 맘껏 누릴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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