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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의 축구세상]꿈과 꿈이 맞붙는 네이션스컵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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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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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본질적으로 곳곳에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는 스포츠다. 몇 센티미터 벗어난 슈팅 한 개, 찰나의 작은 실수 하나, 운이 따르지 않은 심판 판정 등등으로부터 승부가 갈리곤 한다. 따라서 불과 몇 경기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단기 토너먼트에서 당대 최고의 팀들끼리 맞붙는 '꿈의 결승전'이 성사되기란 생각만큼 쉽지가 않으며, 실상 그러한 결승전은 축구사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2012 아프리칸 네이션스컵에서 예정된 '꿈의 결승전'이 있었다면 그것은 필경 '코트디부아르 대 가나'의 매치업일 것이다. 네이션스컵 강자 이집트를 비롯해 카메룬, 나이지리아와 같은 전통 강호들이 본선에 합류하지 못했지만, 설령 그들이 함께 있었다손 치더라도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한 판이야말로 외견상 지금의 아프리카 축구를 대표하는 양대산맥의 한 판이라 해도 좋은 까닭이다. 실제로 코트디부아르와 가나가 각각의 조에서 1위로 8강에 오르면서 대진에 따라 두 팀의 결승전 조우 가능성은 커지고 있었다. 이 만남이 성사된다면 아마도 그것은 2000년 벌어졌던 카메룬 대 나이지리아의 한 판(카메룬의 승부차기 승리) 이후 가장 육중한 네이션스컵 결승전이 될 법했다.
그러나 축구의 신은 이번 네이션스컵에서 통상적인 의미의 꿈의 결승전이 아닌 '완전히 다른 의미의' 꿈과 꿈의 대결을 선택했다. 코트디부아르가 제르비뉴의 장거리 단독 드리블 골에 힘입어 결승에 안착하기 몇 시간 전, 가나는 잠비아에 0-1로 무릎을 꿇으며 결승전 티켓을 잠비아에 넘겨줬다. 남아공월드컵 8강전에서 승리의 축포가 될 수 있었던 막판 페널티킥을 실축, 승부차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던 아사모아 기안이 이 경기에서도 다시금 경기 초반 페널티킥을 놓친 것이 가나에겐 뼈아픈 일이었다. 가나는 전체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었으나 골 결정력이 따르지 않은 데다, 대회 내내 가나를 괴롭힌 창의성 부족 및 일부 선수들의 컨디션 저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많은 이들이 기대 혹은 예상했던 코트디부아르와 가나의 '최강 대 최강' 승부는 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코트디부아르와 잠비아의 결승전은 그와는 다른 뜻 깊은 한 판을 예고하고 있다. 우선 이 결승전은 1993년 4월의 비행기 참사로 황금세대의 대부분을 잃었던 바로 그 잠비아가 실로 오랜만에 아프리카 축구의 높은 곳으로 돌아오는 경기다. 88올림픽에서 이탈리아를 4-0으로 대파하기도 했던 잠비아는 1994 월드컵 예선을 위해 이동하던 중, 중간 급유지인 가봉의 리브르빌 근해에서 대표 팀을 태운 비행기가 폭발하며 추락하는 비극을 겪는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고, PSV 에인트호벤에서 뛰고 있어 개별 이동했던 팀의 간판 칼루샤 브왈리아(이탈리아 전 해트트릭의 주인공이자 아프리카 축구의 역대급 스타)만이 천운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이 사고는 한때 음모설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잠비아 사람들에게 '가봉'이라는 단어는 좋지 않은 의미의 속어처럼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비극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잠비아가 보여준 저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참사로부터 오래지 않아 열린 1994 네이션스컵에서 잠비아는 브왈리아와 2진급 선수들로 새로운 팀을 꾸려 출전, 나이지리아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6년의 네이션스컵에서도 잠비아는 3위를 차지했고 그들의 FIFA 랭킹은 15위까지 오르게 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만약 그 참사가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잠비아가 한 동안 아프리카 정상급 팀으로서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을 것이라는 가정법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 잠비아 축구는 96년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잠비아 축구가 부활의 기미를 싹틔운 것은 그들의 영웅 브왈리아가 잠비아 축구협회 부회장을 거쳐 회장직에 오르면서부터라 해도 좋을 듯하다. 2006년 잠비아 감독직에서 내려온 후 행정가로 변신한 브왈리아는 선수들 간 호흡이 척척 맞는 지금의 잠비아 팀을 계획, 구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번 네이션스컵에서 '선수 교체의 달인'과도 같은 면모를 보이는 프랑스 출신 감독 에르베 르나르를 발굴, 중용한 이도 브왈리아다. 현재의 잠비아 대표 팀은 짧지 않은 기간 꾸준히 손발을 맞춰온 선수들이 상당수이고, 이는 이번 대회 잠비아를 공수 양면에 걸쳐 두드러진 조직력을 과시하는 팀으로 만든 원동력이다.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평가전이기는 했지만, 2010년 1월 대한민국 대표 팀 또한 손발 잘 맞는 잠비아 공격진을 경험(우리의 2-4 패배)한 바 있다.

선수들 간 호흡과 용병술이 절묘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 더하여, 이번 네이션스컵에 임하는 잠비아 선수단의 결의와 정신력은 처음부터 남달랐다. 가봉과 적도기니 공동 개최로 열린 이번 대회에서 잠비아는 93년 참사가 일어났던 리브르빌에서 경기를 펼쳐 선배 영령들을 기리고자 했는데,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잠비아는 조별리그 2위가 될 경우 4강, 조별리그 1위로 올라갈 경우엔 반드시 결승전에 진출해야만 했다. 이는 설사 조별리그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잠비아에겐 근본적으로 쉽지 않은 과업. 그러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부터 세네갈을 격파한 잠비아는 마침내 가나마저 물리치고 그 소원을 이루게 됐다. 준결승 이후 잠비아 선수단은 곧바로 리브르빌 사고 지역으로 달려가 선배 영령들에 헌화했다.

그러나 잠비아의 상대 코트디부아르에게도 이번 결승전은 축구적인 측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올 한 판이다. 이번 결승전에서 우승을 놓칠 경우 이른바 코트디부아르의 황금세대가 '빈손'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도 있는 까닭이다.

1978년생 디디에 드록바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그 즈음부터 코트디부아르는 아프리카 축구를 새롭게 대표하는 세력으로 간주돼왔다. 하지만 바로 그 드록바가 선수 생활 종반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을 비롯해, 드록바보다는 다소 젊으나 디디에 조코라, 콜로 투레, 샤카 티에네, 부바카 바리, 카데르 케이타와 같은 이들이 서른 줄을 넘겼다. 야야 투레, 아르투르 보카, 엠마뉘엘 에부에 등도 서른에 가까워진 선수들. 물론 제르비뉴, 셰이크 티오테, 막스 그라델, 살로몬 칼루 등이 20대 중반 한창 나이에 있지만, 코트디부아르가 황금세대의 맏형 드록바와 더불어 트로피를 들어 올릴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공산이 크다.

외관상 점점 좋아져온 멤버 구성에도 불구, 코트디부아르는 2006년 네이션스컵에서 준우승, 2008년 4위, 2010년에는 8강에 그치며 언제나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다소간의 창의성 부족, 다소간의 정신력 부족, 혹은 다소간의 불운과 같은 요소들이 코트디부아르의 발목을 잡곤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번 대회는 '3전4기'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는 긍정적이다. 우선 야야 투레와 제르비뉴가 공존하면서 코트디부아르의 창의성은 여느 때보다 양호해 보인다. 팀의 기둥 드록바가 적절한 우승 의지를 드러내고 있고 클럽 동료 칼루와의 호흡도 좋다. 그라델 또한 쏠쏠하게 활용 가능한 공격 옵션이며, 세트플레이에서의 한 방도 잠비아에겐 커다란 위협이 될 전망이다. 티오테, 조코라가 지키는 중원의 수비력에도 신뢰를 보낼 만하다. 공격진의 솜씨와 호흡이 만만찮은 잠비아를 너무 가벼이 여기지만 않는다면, 코트디부아르는 틀림없이 우승에 매우 근접해있다.

결국 이번 네이션스컵의 결승전은 '최강 대 최강'의 매치업으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선배들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치고픈 '황금세대의 후예들'과 빈손으로 물러가고 싶지 않은 아프리카의 대표적 '황금세대'가 맞닥뜨리는 한 판으로 치러지게 됐다. 어느 쪽의 꿈이 더욱 절실하게 나타날 지가 매우 궁금하다.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아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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