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이 내 세상 - 국민배우 안성기를 만나다
[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54년째다. ‘국민 배우’ 안성기가 연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고(故) 김기영 감독의 1957년작 ‘황혼열차’다. 배우 김지미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황혼열차’를 필두로 안성기는 지금까지 100여 편에 육박하는 한국 영화들에 출연하며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 남자 연기자로 자리매김했다.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강우석, 김유진 등 한국의 주요 감독들의 대표작들에 두루 출연하며 어느덧 한국 영화계의 맏어른이 된 안성기는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는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좋은 영화라면 괜찮다. 한국 최초의 3D 영화 ‘7광구’의 ‘정만’도 이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는 캐릭터다. ‘7광구’의 엄청난 비밀을 담은 악역 정만으로 돌아온 영화 배우 안성기를 만났다.
화려한 휴가 그리고 7광구 김지훈 감독의 전작 ‘화려한 휴가’에서도 시민군 대장으로 출연하지 않았나. 김 감독이 ‘7광구’에서도 내가 꼭 해야 하는 대장 역할이 있다고 집요하게 설득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정만이 전형적인 악인 캐릭터였다면 내가 합류하면서 인간성과 당위성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악역으로 진화했다. 과거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내 흰머리를 관객들에게 보인 것도 '7광구’가 처음이다. 결과적으로 ‘실미도’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로 나온 것 같다.
컴퓨터그래픽 ‘7광구’처럼 본격적인 컴퓨터그래픽(이하 CG) 영화는 처음이다. CG가 영화 전체 장면의 98퍼센트라니 말 다 했지. 30m 좁은 공간에서 연기했던 장면들이 완성된 영화에서는 100m로 확장되서 보이는 등 CG 마법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블루 스크린에서 연기하는 것은 어려웠다. 상대 배우의 눈을 보고 연기해야 공포·분노·기쁨 등의 감정이 일어나는 건데, 그저 허공에 대고 그런 감정을 느껴야 했기 때문에 최대치로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는 부분이 많았다.
3D 나는 만족한다. 물론 CG나 입체영상(이하 3D)에서 어색한 부분이 다소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년이 조금 넘는 짧은 제작 기간을 고려한다면 '7광구'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수중 장면이나 불, 괴물 등 할리우드 영화의 1/10 정도의 제작비로 창조된 것 치고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3D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라고 할까? 1년의 시간을 보내도 아쉬운 장면이 계속 발견되는 것을 보면 CG와 3D 작업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끝이 안 보인다는 것은 CG의 한계점인 동시에 장점이다.
하지원 정말 그런 배우 없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문소리도 열심히 했지만, (하)지원이는 몸 안 사리는 역할 연기한 지 아주 오래 되지 않았나.(하지원은 현재 신작 'KOREA'에서 탁구 선수 현정화로 출연하고 있다) 이명세 감독 ‘형사:Duelist’ 할 때 스턴트맨을 쓰지 않고 최대한 자기가 다 해내려는 욕심으로 똘똘 뭉친 악바리다. 배우는 자신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지만 이 재능이 밖으로 빛나는 것의 여부는 철저히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 (하)지원이는 재능과 노력, 두 가지를 겸비한 배우다. 그 열정이 부럽다.
맏형 임권택 감독님 현장 가면 내가 중간 정도니까, 어리광은 아니지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요즘에는 백이면 백 내가 가장 나이가 많다. 일부러 이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한다. ‘화려한 휴가’ 때 지금은 군대에 가 있는 이준기가 항상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숨어서 담배를 피우더라고. 이왕 피울거면 내 앞에서 떳떳하게 피우라고 했더니, 어느 순간부터 (이)준기가 내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있더라고. (웃음) “요것 봐라?” 라는 생각이 살짝 들긴 했지만 아주 기쁘고 뿌듯한 순간이었다.
한국영화시장 1960년대와 비교한다면 열 배 정도 파이가 커졌다. 영화 현장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산업으로 변화했다. 테크놀로지나 물리적인 작업 환경은 발전했지만, 배우들의 출연료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선 것 같지는 않다. 소수의 주요 배우들 제외하면 나머지 대다수 배우들은 여전히 어려운 상태다. 철저히 본인들이 좋아서 감수하고 하는 거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다른 일반적인 직업과는 달리 영화라는 매체가 시작과 끝이 확실하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과정을 스스로 목격하게 되니까, 성취감이 다른 직업과는 비교하면 월등히 높다. 지난 반 세기 동안 내가 연기를 했던 가장 큰 이유다.
스크린쿼터 ‘페어 러브’(2010) 때 절감했다. 개봉 첫 주말인데 정작 영화를 강남에서 상영하는 곳이 단 한 곳 밖에 없었으니까. 철저히 객석점유율에 의해 움직이는 멀티플렉스에서는 다양한 영화를 틀기가 구조적으로 힘들다. 인디펜던트 영화나 예술 영화들을 상영하는 단관 극장들이 따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도움이 필수적인 영역이다.
외도 영화 외에는 겁이 나서 TV 드라마나 연극은 한편도 한적 없다. 영화가 다시 찍을 수 있는 매체라면, 연극은 실수하면 실수 그 자체로 무대가 끝난다. 도전을 하더라도 영화 안에서 하고 싶다. 다른 장르에서 도전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시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도전을 한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다. 나는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이 여전히 많이 남았다. 영화 하나면 충분하다.
사진_이준구(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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