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산책]사라진 여성들의 방이 다시 열렸다
리움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20년 복원
검은 장막 안으로 들어서면 연기가 낮게 깔린다. 사이렌이 울리고, 빛이 얼굴을 스친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관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 안에 들어온 사람이 된다.
정강자의 1970년작 '무체전'이다. 당시 국립공보관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이자, 한국 여성 작가가 시도한 초기 환경 작업이었다. 그러나 전시는 중도에 철거됐다. 전위예술을 정치 선동으로 본 국가 권력이 그 방을 닫았다. 남은 것은 몇 개의 기사와 작가의 노트, 기억의 파편뿐이었다. 리움미술관은 이 사라진 방을 56년 만에 다시 세웠다.
5월 5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하는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이 장면에서 출발한다. 이 전시는 '잊힌 여성 작가를 소개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더 정확히는 사라지기 쉬웠던 미술의 형식을 다시 묻는다. 벽에 걸 수 없고, 팔기 어렵고,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는 미술. 그래서 작품으로도, 역사로도 오래 남기 어려웠던 미술이란 무엇인가.
미술은 더 이상 벽에 걸린 사물이 아니었다. 몸을 감싸고, 방향을 잃게 하고, 피부와 귀와 눈을 동시에 흔드는 장소였다. 문제는 그런 미술이 오래 남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전시가 끝나면 해체됐고, 시장에서 거래되기 어려웠고, 기록은 흩어졌다. 여기에 여성 작가라는 조건이 더해지면서 이들의 작업은 미술사에서 한 번, 작품의 물리적 소멸로 또 한 번 지워졌다.
전시는 1956년 일본 구타이 미술전에서 선보인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부터 1976년 베니스 비엔날레 '환경/예술'까지 약 20년을 다룬다. 주디 시카고, 리지아 클라크, 라우라 그리시, 알렉산드라 카수바, 정강자, 레아 루블린, 마르타 미누힌, 타니아 무로, 난다 비고, 야마자키 츠루코, 마리안 자질라 등 여성 작가 11인의 환경 작업이 실물 크기로 재구성됐다.
'환경'은 관람자가 작품 바깥에 서는 형식이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 빛과 소리, 색과 공기, 바람과 촉각을 온몸으로 겪는 예술이었다. 지금은 익숙한 '설치'의 전사(前史)에 가깝다. 그러나 그 역사를 쓸 때 여성 작가들의 이름은 자주 빠졌다. 작업이 남기 어려웠고, 기록은 부족했으며, 미술사의 중심은 여전히 회화와 조각, 남성 작가와 제도권 서사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이 전시의 핵심은 복원이다. 다만 원본을 고스란히 되돌린다는 의미의 복원은 아니다. 오히려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견디는 복원에 가깝다. 안드레아 리소니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과 마리나 푸글리에세 밀라노 MUDEC 관장은 당시 잡지 기사, 전시 도면, 사진, 작가 에스테이트 자료를 추적했다. 생존 작가와는 직접 대화했고, 작고 작가의 작업은 유족과 자료를 통해 맞춰갔다. 리소니 감독은 간담회에서 이를 두고 "포렌식"이라는 표현을 썼다. 창작이라기보다 수사에 가까운 일이라는 뜻이다.
'무체전'은 그 어려움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준다. 정확한 도면도, 치수도, 조명의 각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은 비닐 장막, 연기, 광선, 작가의 목소리라는 단서만 있었다. 리움은 신문 기사와 작가 노트, 유족 증언을 토대로 공간을 재구성했다. 당시 정강자의 실제 목소리는 남아 있지 않아, 유족이 제공한 음성 자료를 바탕으로 AI 음성을 만들었다. 이것을 원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쉽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물음 자체가 이 전시의 중요한 일부가 된다.
정강자의 방이 끊긴 시간이라면, 마리안 자질라·라 몬테 영·최정희의 '드림 하우스'는 이어지는 시간이다. 1962년 구상돼 1966년 뉴욕 로프트에서 처음 실현된 이 사운드와 빛의 환경은 지금도 계속 변주되고 있다. 리움 전시는 이 작업을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인다. 하나는 강제로 닫힌 방이고, 다른 하나는 계속 살아남은 방이다. 리움은 이 둘을 나란히 놓으며 환경예술의 두 시간을 보여준다. 복원의 시간과 지속의 시간이다.
전시장에는 설명보다 먼저 몸이 반응하는 순간들이 많다.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은 몸을 낮춰 들어가야 하는 붉은 구조물이다. 리지아 클라크의 '집은 곧 몸'은 수정과 탄생의 과정을 통과하는 신체적 장치다. 마르타 미누힌의 '뒹굴고 살아라!'는 매트리스로 만든 유희적이고 도발적인 공간이다. 라우라 그리시의 '남동풍' 앞에서는 실제 바람이 관람객을 밀어낸다. 주디 시카고의 '깃털의 방'은 단단한 재료와 직선의 권위 대신 가볍고 흩날리는 물성으로 방을 채운다.
하지만 이 전시는 '체험형 전시'와 다르다. 빛이 예쁘고 공간이 낯설어서가 아니다. 감각이 곧 주장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천, 깃털, 바람, 연기, 사운드는 장식이 아니다. 회화와 조각이 차지한 미술사의 자리를 밀어내고, 관람자의 몸을 작품의 한복판에 세우는 방식이다. 여성 작가들의 작업이라는 사실도 여기서 중요해진다. 이들은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형식을 택한 것이 아니라, 기존 중심의 언어로는 만들 수 없는 공간을 열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간담회에서 이 전시를 "전문적이고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있으면서 대중적인 전시"라고 했다. 실제로 아이도, 미술사 연구자도 각자 다른 층위에서 반응할 수 있는 전시다. 그러나 그 쉬운 반응 뒤에는 무거운 질문이 붙어 있다. 왜 어떤 작품은 오래 보존되고, 어떤 작품은 먼저 사라지는가. 왜 어떤 작가는 미술사의 이름으로 남고, 어떤 작가는 뒤늦게야 복원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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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간 안으로'가 보여주는 것은 11명의 여성 작가만이 아니다. 미술사가 무엇을 작품으로 인정해왔는지, 무엇을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왔는지에 대한 늦은 반문이다. 전시장을 나와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빛의 잔상이 아니다. 한때 닫혔던 방들이 아직도 우리 미술사 안에 많다는 사실이다. 전시는 11월 29일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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