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권력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엘카노 왕립연구소
미국과 러시아, 중국이 경쟁하는 세력권 중심의 글로벌 체제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럽이 선호해 온 개방적이고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유럽도 미국과 중국이 유럽에 의존하는 글로벌 가치사슬을 활용해 무기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유럽산 수입에 80% 이상 의존하는 핵심 병목 지점(critical chokepoint)은 중국이 41개이고 미국이 67개이며, 여기에는 의약품 원료, 인슐린과 기타 호르몬, 의료기술,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농업·제지·금속가공·섬유·첨단 제조업에 쓰이는 특수 산업기계 등이 포함된다.
다만 유럽은 미국과 달리, 뜻을 같이하는 파트너들과 지렛대를 결집함으로써 양자 간 의존관계를 더 광범위하고 효과적인 체계적 억지력으로 전환해야 하고, 이처럼 결집된 지정학·경제적 지렛대를 새로운 유럽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2020~2023년 스페인 정부의 사회권 담당 국무차관을 지냈던 이그나시오 알바레스 마드리드 자치대학교 응용경제학부 교수는 스페인의 국제관계 및 전략 연구 싱크탱크인 엘카노 왕립 연구소(Elcano Royal Institute) 홈페이지에 올린 ‘권력의 언어를 다시 배우기: 유럽연합이 무역을 지경학적 억지력으로 전환하는 방법(Relearning the language of power: how the EU can turn trade into geoeconomic deterrence)’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글의 통계수치 등 상당 부분은 최근 10개 EU 회원국 대표들로 구성된 고위 전문가 그룹 ‘지정학적 유럽 태스크포스(Geostrategic Europe Taskforce)’가 발표한 ‘권력의 언어 다시 배우기(Relearning the Language of Power)’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인용했다.
다음은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권력의 언어 다시 배우기’ 보고서는 최근 몇 달간 이어진 유럽의 지정학적 상황과 글로벌 경제 속에서 유럽 대륙이 스스로의 운명을 어떻게 다시 설계할 수 있을지를 둘러싼 논의에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된다. 핵심 제안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현재와 같은 방어적 봉쇄 관점에서 벗어나, 국제무역이 부여하는 협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권력 전략의 토대를 능동적으로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유럽의 권력 모델은 낡고 침식됐다. 유럽의 전통적인 소프트파워 모델은 두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역내 시장의 규모였고, 다른 하나는 EU의 규범 권력이었다. 디지털 거버넌스, 소비자 보호, 환경 규제 같은 영역에서 유럽의 규범이 유럽 바깥의 행동까지 좌우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WTO(세계무역기구) 기반 질서는 대규모 개방경제인 유럽에 상업적 상호의존이 대체로 유리하게 작용하는 안정적 법적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국가 간 상호의존의 성격은 크게 바뀌었다. 무역, 공급망, 규제 비대칭은 더 이상 주요 강대국들에 의해 중립적인 장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이제 그것들은 체계적 지정학 경쟁의 도구로 간주된다. 오늘날 더 결정적인 것은 시장과 소프트파워에서 나오는 영향력이 아니라 하드파워와 상호의존을 지정학적 전략 수단으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수출통제, 금융제재, 공급망 제한, 이주 압박 같은 수단이 국가 운영의 핵심 요소가 됐고, 경제정책과 안보전략의 경계를 흐리며 상호의존 자체를 권력 경쟁의 장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법, 절차, 시장 매력에 의존하던 유럽의 기존 방식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유럽은 권력의 열쇠를 다시 배워야 한다. 일각의 주장과 달리 유럽은 이 새로운 환경의 단순한 피해자로 볼 수 없다. EU는 이미 상당한, 다만 충분히 활용되지 않은 지정경제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권력의 언어를 다시 배우기 위해서는 현재 접근법을 바꿔야 한다.
실제로 EU는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무기화할 수 있는 핵심 지점, 즉 전략적 지렛대로 쓸 수 있는 ‘병목(chokepoints)’을 갖고 있다. 중국이 최근 몇 년간 해 온 방식과 유사하다. 중국이나 미국이 EU산 수입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제품 범주는 적지 않다. 보고서 ‘권력의 언어 다시 배우기’에 따르면, 유럽산 수입이 전체 공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핵심 병목은 중국의 경우 41개, 미국의 경우 67개에 달한다. 의약품 원료, 인슐린과 기타 호르몬, 의료기술,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농업·제지·금속가공·섬유·첨단 제조업에 쓰이는 특수 산업기계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지정경제적 지렛대는 연합을 구축해 더 키울 수 있다. 유럽은 권력의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하지만, 그 방식은 미국식 전략과는 매우 달라야 한다. 유럽은 다른 나라들과 폭넓은 연합을 구축함으로써 권력을 형성해야 한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다보스 연설에서 제안했듯, EU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중견국들과 지렛대를 결집함으로써 영향력을 배가할 수 있다.
세력권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계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유럽의 고립이 아니라 공동 이익, 집행 가능한 약속, 집단 억지에 기반한 연합 구축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모델은 명백히 ‘포스트 WTO’적이다. 규칙과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 접근, 수출통제, 반강압 장치, 새로운 시장과 저탄소 산업 육성 협력 등을 조율하려는 국가들 간의 일종의 클럽형 배열을 통해 다른 기반 위에서 이를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목표는 단순히 유럽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협력이 지렛대 없이 지속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협력을 중시하는 새 규범 질서를 떠받칠 수 있는 새로운 유럽형 권력 모델을 상상하는 데 있다.
이 새로운 유럽 권력 모델이 작동하려면 EU 내부의 강한 제도적 일관성도 필요하다. EU는 무역방어 수단, 반강압 메커니즘, 핵심 원자재 파트너십, 외국인 직접투자 심사, 수출통제 역량, 규제 권력 등 많은 관련 도구를 이미 갖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파편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외교정책, 통상정책, 기후정책, 산업전략은 하나의 지정학 설계 아래 통합되기보다 병렬적으로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해외에서의 새로운 연합뿐 아니라 유럽 내부의 보다 통합된 전략 문화도 필요하다. 이는 회원국들 상호 간은 물론, 회원국과 집행위 사이, 나아가 집행위 내부의 총국들 사이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EU는 흩어진 역량을 알아볼 수 있는 권력 위치로 바꿀 수 있다.
유럽의 새로운 전략은 집단 권력을 통한 억지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에 대응하는 현재 EU 전략은 잘못된 방향에 놓여 있다. 트럼프는 관세, NATO, 심지어 군사적 위협에 대한 불확실성까지 협상 수단으로 체계적으로 활용해 왔고, 미국이 더 큰 지렛대를 가진 양자 관계 상황을 이용했다. 높은 이해관계와 미국의 공약에 대한 의문 앞에서 유럽 지도자들은 대체로 피해를 줄이는 쪽을 택했고, 미국이 주요 국제협정에서 탈퇴하더라도 보복을 피하면서 무역, 국방비 지출, 에너지 의존 같은 문제에서 양보했다. 그러나 그린란드 사례에서 보듯 보다 단호한 입장, 신뢰할 만한 대응 조치, 더 명확한 원칙에 기반한 대안 전략은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집단 권력을 통한 억지는 지렛대를 단독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과 조율해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EU와 유사한 전략적 병목을 통제하고 미국과 중국 양측의 압박 위험을 함께 느끼는 국가들과 손을 잡아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면, 유럽의 지정경제적 억지력은 크게 강화될 수 있다.
현재 많은 중견국들은 이런 형태의 연합을 원하고 있으며, EU는 미국의 후퇴와 전 세계적 불확실성이 겹친 시점에 이 연합을 이끌고, 새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형성하는 데 독특한 기회를 맞고 있다. 유럽이 주도하는 헌신적 파트너 연합이 만들어내는 대안적 국제질서는 보다 통제된 형태의 세계화를 우선하면서도 법적 규범과 제도적 협력에 뿌리를 둘 수 있다. 이 접근은 캐나다와 일본은 물론 글로벌 사우스의 핵심 국가들까지 포함한 유럽과 우호국 간의 긴밀한 조율에 의존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은 더 이상 미국 패권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에서, 보다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질서의 선두에 설 수 있다.
더 큰 전략적 자율성을 달성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렛대는 저절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부는 자국 기업이 매출 감소, 보복, 비용 증가를 우려할 경우 수출통제나 제재를 발동하는 데 주저할 수 있다. EU에서는 제재 집행처럼 만장일치를 필요로 하는 사안도 있고, 통상정책에 속해 가중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있다. 더구나 연합 파트너들은 비용 분담과 위기의 순간에 다른 국가들이 실제로 행동할지에 대해 우려할 것이다. 따라서 사전에 합의된 규칙, 신뢰할 만한 약속, 나아가 반강압 조치를 발동했을 때 일시적 경제 손실을 흡수할 수 있는 안정화 메커니즘이나 보상기금까지 필요하다. 새로운 질서는 수사(修辭)만으로 유지될 수 없고, 연합의 연대가 실제로 믿을 만하다는 점을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글로벌 가치사슬의 핵심 병목을 통제하는 주체는 EU 자체가 아니라 개별 회원국이라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네덜란드 기업 ASML의 최근 사례는 유럽이 병목을 활용하고 기술을 지정학적 권력 수단으로 쓸 경우 얼마나 큰 지렛대를 행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고도 노광장비의 대중국 수출 제한을 실제로 집행한 것은, 강한 미국 압박 속에서 일방적으로 행동한 단일 국가였다는 점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EU 회원국들의 대응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임계 규모의 국가들 사이 정렬을 촉진하며, 비EU 파트너들과의 일관된 연합 형성을 가능하게 할 사전 규칙과 제도 틀을 발전시키는 일이 필수적이다.
다행히도 이런 작업은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규칙과 제도를 구축할 발판이 존재한다. 특히 흥미로운 사례는 2023년 12월 채택된 EU의 반강압수단(ACI)이다. 이 제도는 제3국이 무역 제한, 보이콧, 규제 조치 등을 통해 회원국이나 EU 자체에 경제적 압박을 가하려 할 때, EU가 조율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논리는 분명히 억지에 있다. 먼저 대화를 시도하되 강압이 지속될 경우 관세, 유럽 시장 접근 제한, 투자 통제, 공공조달 참여 제한 등 비례적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핵심은 단순 대응이 아니라 강압의 비용을 높여 애초에 그런 시도를 막는 데 있다. EU는 아직 이 수단을 직접적 경제 보복에 공식 활용한 적은 없다. 잠재적 한계 중 하나는 거버넌스 구조에 있을 수 있다. 제도 설계는 신속성과 정치적 통제 사이의 균형을 의도적으로 맞추려 했으며, 발동을 위해서는 집행위의 개시와 EU 이사회의 가중다수결 승인이 필요하다. 이는 개별 국가의 거부권을 막아주지만,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를 요구하는 만큼 발동 문턱이 너무 높아 실제 사용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이 문턱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국제무역에서 비차별 원칙은 본질적으로 안정화 효과를 갖는다고 전통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강압이 커지는 세계에서는 모든 행위자를 동일하게 대하는 것이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탈 행위를 보상하고, 비대칭을 무시하며, 규칙을 지키는 국가들을 착취에 노출시킬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은 파트너와 이탈자를 구분하는 보다 조건부적인 대외경제정책이 필요하다. 물론 이 구분은 언제나 쉽지 않을 것이다. 시장 접근, 금융, 조달, 표준, 통상 특혜는 공동 규칙 준수 여부와 연계돼야 한다. 이런 파트너·이탈자 구분은 보호무역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클럽형 질서에서 연합의 결속을 지키고 협력을 더 신뢰할 만하게 만드는 안정화 원리로 구상된다. 혜택은 공통 규칙을 지킬 의지가 있는 회원들에게 집중되고, 이는 초기에는 ‘의지 있는 연합’에 의해 합의될 수 있다. 반대로 이탈하거나 상호의존을 무기화하는 행위자에게는 관세, 수출 제한, 기타 불이익이 가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럽 내부의 권력 논쟁은 재구성돼야 한다. 정답은 고전적 의미의 유럽판 세력권이 아니다. 그것은 중견국과 지역 강국 간의 연합 전략이며, 억지를 법적 규범과 제도적 협력, 그리고 통제된 형태의 세계화에 헌신하는 대안적 국제질서를 만드는 수단으로 보는 접근이다. 목표는 단순히 규칙 없이 경쟁하려는 강대국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업데이트하고 개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억지력을 구축하는 데 있다. 또 목표는 미국과 중국을 이 국제 연합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중견국과 지역 강국들의 강압적 억지를 통해 이들을 점진적으로 편입시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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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여전히 규칙에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집행 가능한 결과가 없는 규칙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유럽은 개방성을 중시해야 하지만, 이제 개방은 상호주의와 전략적 균형을 조건으로 해야 한다. 유럽은 여전히 파트너가 필요하지만, 그 협력 형태는 더 이상 지난 10년간의 느슨하고 분절된 파트너십 모델이어서는 안 된다. 무역, 기후, 기술, 안보를 상호 강화하는 국가 운영의 영역으로 다루는, 더 정치적이고 더 선택적이며 더 통합된 연합 모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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