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대통령선거 마지막 날인 17일(현지시간) 낮 12시에 맞춰 곳곳에서 이른바 '나발니 시위'가 벌어졌다. 지난달 옥중 사망한 반정부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항의를 표하는 시위다. 시위에 참여한 나발니의 부인 율리아 나발나야는 투표용지에 남편 이름을 적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이날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린부르크, 첼라빈스크, 톰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 주요 도시의 투표소 밖에서 유권자들이 줄을 서서 푸틴 대통령에게 맞서는 정오 시위가 열렸다. 앞서 나발니가 생전에 "완전히 합법적이고 안전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동참을 촉구했던 시위 형태다.
이날 모스크바 내 다수 투표소는 조용했지만 정확히 정오가 되자 긴 줄이 나타났다고 WP는 전했다. 대부분 20~30대 시민이었으며 인근에는 경찰차, 순찰차가 맴돌았다. 엘리자베타 씨는 WP에 "푸틴에게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말했다. 니콜라이 씨는 "내 입장을 밝히고 이 나라에 여전히 다른 의견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왔다"면서 "이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나발니가 나의 대통령", "전쟁 반대, 푸틴 반대", "푸틴은 살인자" 등 항의 구호와 함께 투표 용지 사진을 게시하기도 했다.
WP는 이번 대선이 역대 최초로 3일에 걸쳐 진행됐다는 점을 언급하며 "일요일 정오에 갑자기 몰려든 유권자들이 우연은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고 짚었다. 다만 러시아 당국이 집회 활동가 등을 무자비하게 단속해온 점을 들어 러시아에서는 그 어떤 형태의 시위도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인권단체 OVD인포는 이날 대선과 관련해 17개 도시에서 최소 74명이 이상이 구금됐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는 남편이 전체주의국가를 다룬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조지 오웰을 연상시키는 오웰 스카프를 착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부부도 있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당국이 군인을 대동하고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투표를 강요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에게 항의하는 정오 시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를 떠난 이들이 다수 모여있는 국가들에서 더 두드러졌다. 아르메니아, 카자스흐탄, 키르기스스탄, 독일, 중국, 포르투갈, 영국 등이 대표적이다. WP는 러시아와 전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날 시위에 참여했는지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공개된 사진, 영상 등에는 많은 투표소에 수백명의 유권자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친 크렘린 분석가 세르게이 마르코프조차도 이번 시위를 두고 "정치 기술의 관점에서 볼 때 훌륭했다"고 언급했다.
나발니의 부인 나발나야도 이날 정오에 맞춰 독일 베를린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발나야가 대사관 앞에 늘어선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지지자들은 그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후 나발나야는 투표소에서 나와 앞에 모인 취재진과 지지자들에게 "와서 줄을 서 준 모두에게 감사하다"며 "물론 나는 나발니의 이름을 적었다"고 말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에 대한 질문에는 "메시지는 그만 물어 달라"며 "그는 살인자이고 깡패이므로 그와는 협상도 무엇도 있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현대판 차르’로 불리는 푸틴 대통령은 지난 15일부터 이날까지 진행된 러시아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사실상 5선을 확정했다. 러시아 여론조사센터 브치옴에 따르면 대선 출구조사에서 푸틴 대통령의 득표율은 87%에 달했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역시 개표가 40% 진행된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의 득표율이 87.634%라고 발표했다.
이번 대선의 승자는 일찌감치 확정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보리스 나데즈딘 등 반정부 성향 인사들은 올해 대선을 앞두고 후보 등록조차 거부됐다. 그나마 후보자로 등록된 3인은 친푸틴 성향의 인물로 존재감도 미미해 '구색 맞추기'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날 대선 승리로 푸틴 대통령은 2030년까지 집권을 연장하게 된다. 사실상 종신집권의 길인 셈이다.
조슬기나 기자 seu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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