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말
[아시아경제 최석진 기자] “31년 동안 사실심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호흡하며 재판만 해 온 사람이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어떤 모습인지 이번에 보여드릴 것을 기대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다음날인 지난 2017년 8월 22일 양승태 대법원장을 면담하기 위해 대법원을 처음 방문한 날 카메라 앞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 춘천지방법원장이었던 그가 춘천에서 서울까지 관용차 대신 시외버스를 타고 올라온 뒤 지하철을 이용해 서초동에 도착, 서류가방을 손에 든 채 대법원 정문을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전임 대법원장과 사법연수원 기수가 무려 13기나 차이 나는 김 대법원장의 임명은 말 그대로 파격이었다. 대법관 출신이 아닌 대법원장 임명은 48년 만이었다.
법원행정처와 서울중앙지법, 대법원을 순환하며 요직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법원 내 엘리트 판사는 아니었지만, 깐깐해 보이는 그의 얼굴과 신념에 가득 찬 그의 말투에서 무언가 진정성이 느껴졌다.
노무현정부 시절 진보 성향 판사들의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지냈고, 우리법연구회가 해산된 뒤 만들어진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법원 내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판사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파격 인사를 통해 그를 사법부 수장에 앉힌 이유와 그에게 보낸 메시지는 분명했다. 바로 사법개혁이었다.
실제 그는 취임 후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검찰의 ‘사법농단’ 수사에 앞서 2018년 2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구성을 지시하고, 사법농단 연루 판사 13명에 대한 징계를 청구하기도 했다.
6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아선 2021년 김 대법원장이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내부적으로는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현직 법관에 대한 탄핵소추를 방어하지 못했다는 판사들의 원성이 가득하다.
정부와 여당은 ‘시기가 늦춰졌을 뿐 당연히 국회가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한 임성근 부장판사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라 ‘왜 하필 지금인가?’에 대해 정치적으로 여당과 각을 세워야 하는 야당이 아니더라도, 판사들이 보기에 또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 사이 법원에서는 여당의 차기 유력 대선주자 중 한명이었던 김경수 경남도지사와 조국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 이어 최근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까지 범여권 인사들에게 줄줄이 유죄가 선고됐고,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제청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재가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처분 역시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린 바 있다.
이처럼 정부나 여당에 불리한 일련의 법원 판결이 나온 뒤 갑작스럽게 다시 여당에서 불거져 나온 임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 추진은 ‘법원 길들이기’를 위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분명 존재했다.
더욱이 청와대의 연루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는 ‘월성 1호기 원전 경제성 평가조작’ 의혹 수사와 관련 ‘정부 정책과 관련된 일’이라는 정부의 해명에도 법원은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전산자료들을 무단 삭제한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최근 검찰은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윗선을 향한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또 법무부와 검찰 내 친정부 인사 여러명이 연루된 ‘김학의 불법출금’ 수사나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의 윗선에 대한 수사 등에 대해서도 머지않아 법원의 사법 판단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 이미 재판이 시작된 윤 총장에 대한 징계 처분의 효력에 관한 행정소송,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독직폭행’ 혐의로 기소된 정진웅 차장검사에 대한 형사재판 등 정치적으로 예민한 여러 사건들이 법원에 계류 중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갑작스런 임 부장판사에 대한 여당의 탄핵 추진은 오해를 받을 소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김 대법원장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여당이 추진한 임 부장판사의 탄핵에 김 대법원장이 일조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물론 국회에서 탄핵 대상으로 거론되는 후배 법관의 사표를 정치권의 비난을 우려해 수리하지 않은 것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시각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사법권 독립과 정치적 중립을 누구보다 중요시해야 할 대법원장이 후배 법관을 앉혀놓고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강조한 것은 누가 봐도 부적절해 보인다.
나아가 ‘국회의 탄핵 추진을 이유로 임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를 거부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김 대법원장이 거짓말을 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최악의 처신이었다.
그는 야당 국회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를 통해 “탄핵 문제로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임 부장판사가 공개한 면담 녹취파일에는 김 대법원장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탄핵을 언급하는 생생한 육성이 담겨있었다.
그는 또 “임 부장판사의 사표가 정식으로 제출된 것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 역시 거짓이었다. 임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을 면담하기 전 법원행정처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부인할 수 없는 본인의 육성 증거가 공개된 후 김 대법원장이 내놓은 입장은 “언론에 공개된 녹음자료를 토대로 기억을 되짚어 보니, 2020년 5월경에 있었던 임 부장판사와의 면담 과정에서 ‘정기인사 시점이 아닌 중도에 사직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 녹음자료에서와 같은 내용을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였다.
그리고 “약 9개월 전의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했던 기존 답변에서 이와 다르게 답변한 것에 대하여 송구하다”였다.
어차피 녹취파일이 공개돼 부인할 방법이 없어진 자신의 발언 사실은 인정하되, 핵심은 ‘탄핵’이 아니라 ‘중도 사직’이었다는 취지다. 해명이라기보다는 억지스런 변명으로 들린다.
게다가 거짓 해명에 대한 사과에는 ‘9개월 전의 불분명한 기억’을 구실로 삼았다. 사표를 제출하며 대법원장 면담을 요청한 고위 법관을 직접 만나 상당한 시간 대화를 나눴고, 사표를 수리할 수 없는 이유로 ‘법관 탄핵을 추진 중인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수차례 언급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같은 김 대법원장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임 부장판사가 녹취파일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혹은 녹취파일이 없었다면, 김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을까?
복수의 판사 출신 변호사로부터 전해들은 일화가 있다.
김 대법원장이 다른 대법관들과 함께 집무실에서 TV뉴스를 시청하다가 문재인 대통령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보도가 나오자 “아이고 우리 대통령님”이라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얘기였다.
그들 역시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 도는 얘기라며 전해준 것이라 ‘설마 다른 판사들 앞에서 그렇게까지 했을까…’라고 의심하며 흘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만 지방법원장으로 아무도 대법원장 후보로 예상하지 못했던 그를 대법원장으로 전격 발탁해 사법개혁의 중책을 맡긴 문 대통령에게 김 대법원장이 갖는 인간적인 고마움은 이해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이 어떤 식으로든 재판에 혹은 사법행정에 ‘보은’의 형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이미 대법관 인선이나 서울중앙지방법원장,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 등 주요 보직 배정에서 김 대법원장은 진보 성향 내지 친정부 성향의 인사들을 중용해 정치적 편향성이 의심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특히 정경심 교수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가 조 전 장관의 딸 조민씨의 위조된 표창장이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합격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고, 최강욱 대표의 1심 재판부가 조 전 장관 아들의 인턴 증명서가 허위라고 판시했는데도, 조 전 장관이나 정 교수, 최 대표 어느 누구도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여권에서는 도리어 담당 판사를 공격하는 행태를 지켜보고 있자면 김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에 가면 판결 결과가 뒤집힐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민사재판이든 형사재판이든 법정 안에서 늘 한쪽은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법관은 원고와 피고, 혹은 검사와 피고인 중 어느 쪽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판가름 하는 사람이다. 대법원장은 그 법관들의 수장이며 사법부의 얼굴이다.
지금 대법원장의 다분히 의도적인 거짓말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기억력을 탓하며 ‘송구하다’ 한 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법권 독립의 정점에 서 있는 김 대법원장의 말 한마디가 전체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추락시키고 있다.
절대 권력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고 당당하게 맞섰던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처럼 대단한 용기를 내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꼭 봐야 할 주요 뉴스
태국 호텔에서 체포된 한국인 의사…한번에 2만원 ...
국민의 신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할 공직자로서 또 사법권 독립을 수호해야 할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을 만한 발언과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하고 사과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