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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백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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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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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숄과 소피 숄은 남매다.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그들의 동지고. 죽음을 앞둔 이들이 담배를 나눠 피운다. "죽음이 이렇게 간단한 줄 몰랐어." 크리스토프가 작별을 고한다. "하늘에서 만나자." 소피가 가장 먼저 끌려갔다. 사형대까지 40여m.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머리를 치켜든 채 개선장군처럼 걸었다. 다음은 한스였다. 그가 외쳤다. "자유 만세!(Es lebe die Freiheit!)"


1943년 오늘 오후 5시, 독일 젊은이 셋이 차례로 죽는다. 이들은 1943년 2월18일 뮌헨대학 구내에 히틀러와 나치를 규탄하는 전단을 뿌렸다. 전단은 치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책임한 어둠의 충동에 빠진 통치자에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지배'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일은 없습니다. 지금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지만, 극악무도한 범죄가 밝은 햇살 아래 낱낱이 드러날 날이 올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계슈타포에게 붙들려 잔인한 고문과 취조, 재판을 받았다. '인민법정'은 국가반역죄와 이적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 절차 없이 형이 집행됐다. 체포에서 처형까지 나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크 로테문트 감독이 만든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5)은 숄 남매와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다. 자유와 정의를 위해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은 독일의 양심을 대변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군사독재 시대를 경험한 지성이라면 대부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었을 테니. 한스의 누나요 소피의 언니인 잉게 숄이 쓴 소설이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백장미(Die Weisse Rose)'. 숄 남매와 친구들이 만든 지하단체의 이름이 '백장미단'이었다. 잉게는 동생과 친구들이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감행한 저항,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인 필치로 적어나간다.


젊은이들은 죽음 앞에서 의연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은 간수들은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셋이 마지막으로 담배를 피우며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이들은 강철 같은 언어를 말할 줄도 알았다. "오늘은 당신이 우릴 목매달지만 내일이면 당신의 차례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한스처럼. 또한 그들은 믿었다. "이건 헛된 일이 아니야." 그들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 비행기가 백장미단의 여섯 번째 전단지 수백 만 장을 독일 상공에 뿌린다. 그날 베를린의 하늘은 1943년 2월 18일 오전, 전단을 품은 소피가 학교에 들어서기 전에 올려다본 뮌헨의 마지막 하늘처럼 눈부시게 맑았다.


숄 남매와 친구들은 한때 충실한 히틀러 유겐트의 단원이었다. 이들은 어느 날 울름 대성당의 주교 그라프 폰 갈렌 신부의 강론을 듣는다. 갈렌 주교는 나치의 반종교적 태도와 정신지체아 집단 학살을 거침없이 비판하면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의 메시지는 숄 남매의 영혼을 움직였다. 그래. 엄혹한 시대일수록 누군가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깬 자는 말해야 한다. 백장미단이, 그리고 총칼과 독재의 시대를 견뎌낸 우리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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