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는 만나지 못한다.
 사진틀 속의 바다,
 여름 우기에는
 문밖의 그물도 보이지 않고
 날마다
 잔 그물코의 생애를 끌며
 나의 살 속으로 돌아오는 가족들
 언제나 라르고조(調)의 아버지는
 결국
 만나지 못한다.


 2.
 이제 싸움은 모두 끝났다.
 낮은 살 속을 첨벙첨벙 흐르는 누군가의 눈썹들
 멈추지 않는 흰 피들의 발자욱 소리를
 빈방에 누워
 듣는다, 이제
 숨죽이는 칼날이 되고 싶다.
 문을 잠가도
 식구들은 날마다 나의 살 속에 돌아와 눕고
 문밖에는
 잔돌을 나르며 늙어 가는 아버지
 나에겐
 물방울 같은 아버지가 필요했다.
 쌓아도
 쌓아도 출렁거리기만 하는.
 나는 좀 가벼운 아버지를 가지고 싶었다.

 3.
 쓰러지기 위하여
 일어서는 것은 아름답다.
 저물 무렵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물살들

그림=최길수 화백

그림=최길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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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먼 곳에서 쓰러지는 아버지
 나의 살 속에 아직도 박혀 있는
 누군가의 눈썹을 지우며 이제,
 본다.
 아직도 몸속을 구르는 잔돌들,
 낡은 가족사진
 그 한 장의 그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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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매일매일 쓰러지는 사람, 매일매일 쓰러졌다 일어서는 사람. 가족들 몰래 "먼 곳에서 쓰러지는" 사람, 자신이 쓰러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 잔돌 같은 사람, 잔돌처럼 여기저기 구르고 밟히다 잔돌처럼 "늙어 가는" 사람. 아버지, 차라리 물방울이나 되지 그러셨어요. 아버지는 너무 무거워요. 아버지는 너무 단단해요. 왜 그렇게 사셨어요. "나의 살 속에 아직도 박혀 있는" 잔돌들, "아직도 몸속을 구르는" 아버지. 이 시는 정광호 시인이 대학교 3학년이던 1983년 등단할 때 지면에 처음 선보인 작품인데, 그는 졸업 후 곧바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그래서인지 그 뒤 시를 거의 발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귀 기울여 들어보라, 시 속에 여전히 '출렁이고 있는' 빛나는 "그리움"들을. 그러니 이제는 육성으로 듣고 싶다. 저 198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물방울이 돌멩이가 될 때까지 벼리고 다져 왔을 시인, 당신의 지금을.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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