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동네 한 바퀴/하재일
따끈따끈하고 쫀득쫀득한 강원도 찰옥수수가 왔어요. 맛있는 술빵이 왔어요. 동네 한 바퀴, 부지런히 도는 트럭 한 대. 꽁무니 따라가며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도는 내 발걸음. 사람들은 한 명도 모이지 않고 봄밤에 꽃망울 부푸는 벚나무들만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네.
꽃나무 아래엔 온종일 홀로 거리를 지킨 빨간 우체통. 오늘 입에 넣은 건 어느 불량한 길손이 던져 준, 피다 버린 꽁초 한 대뿐. 그래도 이웃이 좋아 주소를 옮길 수 없네.
환하게 꽃 핀 알전구 매달고 열심히 돌아다니는 동네 한 바퀴, 두 바퀴로 이어지는 트럭 한 대. 벚꽃보다 지름길을 알고 먼저 왔네. 목련보다 먼저 달려왔네. 아직 일러 꽃은 불을 켜지 않았고 봄이 오는 밤길을 환하게 비추며 지나가는 트럭 한 대. 오늘 판 거라곤 겨우 해 질 녘 꼬부랑 할머니가 팔아 준 술빵 한 봉지. 누구나 편안한 물컹대는 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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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천천히 걸어 보는 동네 한 바퀴, 서서히 길들이 어둠 속에 잠겨 가네.
■봄이 오고 날이 좋아지면 트럭을 몰고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동네마다 다시 하나둘씩 나타나곤 한다. 찰옥수수도 팔고 술빵도 팔고, 토마토, 사과, 참외, 망고, 고등어, 피조개, 오징어 등등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소리를 들어 보면 정말이지 안 파는 게 없다. 그렇긴 한데 그 트럭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세월아 네월아, 바퀴야 구르고 싶으면 굴러라'라는 심보로 하나같이 느릿느릿 장사를 하러 온 건지 동네 구경을 온 건지 헷갈릴 만큼 유유자적이다. 물론 물건을 팔러 온 사람 마음이야 전혀 그렇지 않겠지만.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저 트럭들이 없었다면 이 고요하기 짝이 없는 동네는 하루나절 동안 얼마나 심심할까 그런 생각도 들어 고맙기도 하다. 오늘은 일부러라도 나가 참외 한 봉다리 사 올까 싶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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