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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추어탕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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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식 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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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꾸라지는 '추어'라는 꽤나 멋들어진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고기 어(魚)에 가을 추(秋)를 더해 미꾸라지 추(鰍)가 된 것은 가을이면 살이 올라 가장 맛있기 때문이겠지만, 얼핏 들으면 왠지 가을 좀 타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세히 보면 작은 눈이 우수에 젖은 것 같기도 하고 미끄덩거리는 몸짓에는 발버둥 칠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배어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미꾸라지에 대한 인식은 추어라는 이름만큼 그럴듯하지는 않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시냇물을 흐려놓는다'거나 '미꾸라지 용 됐다'는 말에는 미꾸라지에 대한 천시가 담겨 있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얍삽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미꾸라지 같은 놈이라고 타박을 놓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하천가에 사는 못생긴 물고기라고 업신여겼다고 한다.
이런 평가는 막상 먹으려 할 때도 남아 있다. 과거엔 청계천 거지들이 끓인 추어탕이 유명했다는 얘기는 예로부터 미끈거리고 기다란 미꾸라지를 통째 넣어 탕으로 끓여 먹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죽하면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갈아서 만드는 조리법이 자리를 잡았을까.

외모만으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미꾸라지는 좀 억울할 수 있다. 효능은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에는 "맛은 달고 성질이 따뜻할 뿐 아니라 독이 없어 비위의 기능을 보해주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고 소개돼 있다.

미꾸라지에겐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겉만 보고 상대를 평가하는 실수는 일찍이 공자도 범한 바 있다. 그는 가르침을 받으러 자신을 찾아온 39살 연하 자우(子羽)가 워낙 못생겨 그 능력도 보잘것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우는 나중에 제자가 300명에 달할 정도로 인품과 능력을 갖춘 이였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며 "얼굴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모취인(以貌取人)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공자가 탄식할 때 자우와 함께 언급한 사람이 재여(宰予)다. 공자는 언변이 뛰어나 높이 평가했던 그가 기대에 못 미치자 "말로 사람을 평가했다가 재여에게 실수를 범했다"고 했다. 이를테면 미꾸라지는 재여가 아닌 자우 같은 음식 되겠다.
이렇게 외양보다는 영양과 맛을 더 중히 여겼던 것이 우리네 서민음식의 정서일 것이다. 그래서 추어탕을 먹을 때면 구태여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째로 들어간 것을 청하곤 한다. 이모취인의 고사를 아로새길 것까지는 없지만 짐짓 당연하다는 듯이 통째를 주문하는 것이 더 호방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1950년대만 해도 추어탕의 주류였다는 서울식은 '추탕'이라고 불렀고 이렇게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어 끓였다. 미꾸라지 등 갖은 건지를 안주 삼고 따뜻한 국물로 속을 풀 수 있었던 것은 겉치레보다 실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민들의 입맛에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시인 수주 변영로의 음주 기행을 담은 '명정 40년'을 보면 이 같은 추어탕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유명한 해정(解酊) 주점이 화동에 있었는데 일컫기를 황보 추탕집이라 하였다. 그 당시 황보 추탕이라 하면 간이주점의 별칭이고 해정 술집의 대용어나 상징어가 될 만한 정도의 명물 집이었다. 우리는 거시내시(去時來時) 심심하면 들러서 해정보다는 차라리 해갈을 한 바…"라고 썼다.

수주의 혜안을 좇아 해갈과 해정을 위해 서울 중구의 한 서울식 추탕집에 앉아 뚝배기 속 미꾸라지를 건지며 생각했다. 자우 대접 받기에는 어딜 가나 제 몸 담근 물 흐리는 미꾸라지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닐까. 하긴 요즘은 미꾸라지보다 용이 더 물을 흐리는 세상이긴 하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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