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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바꿔봐요] 건설 R&D의 제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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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외길 건설엔지니어'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의 주문

연구·개발(R&D)은 새로운 기술과 시장을 찾는 활동입니다. 기업은 누가 뭐라 하든 돈이 되는 연구라면 목숨을 걸고 합니다. 반도체산업의 삼성이나, 2차전지 분야의 LG가 좋은 예입니다. 기업들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R&D가 이익을 창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지금의 수익 구조로는 미래투자의 여력이 없거나, R&D를 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먹고 살 수 있거나, 또는 회사가 더 이상 이 시장에서 생존할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는 등일 것입니다.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이순병 한국공학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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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산업으로 분류되는 건설산업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종류의 중간재들을 조립하는 산업입니다. ‘건설업을 해 본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건설산업은 매우 많은 참여자들이 모여서 정해진 시간 내에 최종 목적물을 인도해야 하는 격렬한 분야입니다.

이런 건설분야의 R&D는 장기간 큰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특성이 있어 공공과 다수의 민간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품개발과 달리 건설기술은 개발하더라도 혼자 쓰기가 어렵고, 창출하는 가치가 얼마인지 측정이 어려우며, 투자회수기간 예측이 제품개발보다 어려운 등의 장애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기존 건설기술들은 이제 성숙단계에 들어갔습니다. 건설분야의 R&D가 교수와 공공연구소가 중심이 되어 학구적으로 흐른다는 지적이 많았던 때에, 정부는 ‘R&BD(Business Development)’라는 용어를 내세우고, 대학이나 공공연구소의 과제를 지원할 때 기업에서 돈을 내고 동참해야 하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평생 한 분야만을 연구한 대학 교수나 공공연구소 연구원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기 분야의 과제가 선정되도록 기업을 찾아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건설 R&D= 민간건설회사가 기술연구조직을 운영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라고 합니다. 중동시장에서 싼 인건비에 의지했던 한국의 건설회사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 토목과 건축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자 몇몇 대형 건설사들이 자체 연구소를 설립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대형 건설회사들이 1990년대 초 자체 연구소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 배경에는 정부의 묵시적 압력이 있었습니다. R&D를 해야 산업이 성장한다는 전문가들의 원론적 주장에 따라 그리 된 것인데, 여기에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해 입찰가점제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말 IMF 사태의 된서리를 맞아 건설회사들은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늘 그렇듯이 기술연구소가 제일 먼저 도마에 올랐습니다. 지금은 국내건 해외건 당장의 수익성 문제로 연구에 쓸 돈이 없어 많은 건설회사들의 기술연구기능은 형체만 남아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일부 대형 건설회사의 기술연구소에서 새로운 먹거리 창출을 선도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 한국의 대형 건설회사들은 업역이 광범위하고 규모가 무척 커져 있기 때문에 자체 기술개발이 얼마나 회사에 기여할 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건설R&D에 종사하는 분들은 국가 R&D예산의 몇%가 건설분야에 배당되느냐를 가지고 건설에 대한 정부 의지의 강도를 언론 등에 홍보합니다. 한국의 GDP 대비 R&D 비중은 세계 1위라고 하는데 연구개발에 대한 의지는 그렇게 비교할 수 있다 치더라도 이건 숫자의 마술입니다. 한국GDP의 1%에 해당되는 돈은, 미국의 1%보다 훨씬 적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R&D는 적은 예산을 가지고 과제의 선정에서부터 결과산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경쟁 상대국들보다 더 엄정하게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관리되어야 합니다.

한때 정부 R&D예산은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R&D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정부 예산이 확정되면 그때부터 R&D 이해관계자들은 자신의 연구과제가 낙점이 되도록 활동을 전개합니다. 공정 경쟁과 공정 배분은 늘 문제가 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가난하더라도 함께 살아가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풍토에서는 R&D예산도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공무원도 편하고 교수도 편합니다. 그런데 ‘배분’이라는 단어 앞에 수식어 ‘공정’이 붙으면 선택과 집중이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담당 공무원 입장에서는 알토란같은 국민의 혈세를 허투루 쓰지 않을까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합니다. 반면 교수들은 정말 하고 싶은 자기분야의 기초 연구도 있을 것이고, 또 대학원생들의 학비도 도와주고 싶을 것입니다. 정부에서 받은 R&D예산을 함부로 쓰다가 망신 당한 교수들도 그간 꽤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연구원들이 밤참으로 먹은 통닭까지 잡아내는 것은 담당공무원이 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연구개발이라는 본래의 목적보다 예산 집행의 투명성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바람에 연구수행에 시간적, 업무적으로 많은 낭비가 있다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건설 R&D의 제 길 찾기= 정부, CEO, 연구자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R&D는 미래 먹거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과제의 특성상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지만 결국은 전문성과 투명성이라는 아주 고질적인 화두가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전문성과 도덕성을 갖춘 분들을 선발하여 이 분들로 하여금 연구과제의 선정에서부터 사후 평가까지 책임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런 분들을 선발하는 절차부터 민간에 맡겨야 합니다. 제 솔직한 심정은 선진국의 건설분야 R&D 전문가를 영입하여 팀을 끌고 가도록 만드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축구의 히딩크처럼.

담당공무원은 “내가 관리할 책임이 있는 돈”이 아니라 “내 아들이 미래에 먹고 살 종잣돈”이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전문가들에게 과제 선정에서부터 최종평가까지 맡기고, 기다리고,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공무원들이 그렇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윗분들 몫입니다. 연구자는 “내 집에서 나온 돈”이라 생각하고 써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만 바꾸면 지금의 많은 문제들이 풀릴 것이라 믿습니다.

기업도 기술연구직원들에게 CEO가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그들에게 맡기고 있다는 믿음을 주고, 기술투자가 이미 결정되었으면 인내를 갖고 연구 결과를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업상의 허장성세나 폼 잡으려고 하는 투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합니다.

요즈음 어느 분야나 “융·복합”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신기술, 신산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분야가 너무 전문화되어 혼자의 힘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 어려운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기존의 토목, 건축, 기계, 전기 등 분야 이외에 정보통신(ICT)공학 분야는 물론 인문사회분야 전문가까지 영입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연구원들로 하여금 다른 분야를 겸하게 할 것인가도 CEO입장에서는 매우 고심해야 할 전략적 사항입니다.

또 한 가지 전략적 사항은 ‘우리끼리’라는 생각의 틀을 과감히 버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글로벌화를 이룰 것인가를 결심해야 합니다. 내가 따온 예산인데 우리끼리 하자는 생각이나, 우리나라 예산인데 왜 외국 연구소에 나눠주느냐는 사고방식이면 R&D는 영원히 글로벌 수준의 꽃을 피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 연구에 끌어들이면 결과물은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 나중에 그들의 연구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는 당위성도 갖게 될 것입니다.

소위 ‘김영란법’이 능동적으로 작용해서 공무원들이 소신껏 일할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더 복지부동하고 책임을 회피할지 큰 갈림길에 있습니다. 이걸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부터 사회지도자들이 해야 할 엄중한 책무입니다.

한때 건설회사들의 과도한 영업행위로 건설기술연구가 오명을 쓰고 퇴색한 적도 있었지만 원론적인 순기능, 즉 기술발전이라는 측면에서는 “기여하였다”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제 갈 길을 바로 잡으면 순기능을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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