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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力은 國力] 술 잘 마시냐고요? '마음의 잔' 먼저 건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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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자 OB맥주 마케팅 이사…83년 역사상 첫 여성 임원

남성 위주 주류 업계서 성공한 비결
이길 수 없는 게임은 과감히 포기

OB맥주 입사 뒤 5년간 매일 신제품 공부
열성적 스타일·집요한 마케팅 전략 적중
실제 술 잘 못 마시지만 관계지향적 성격
남은자 OB맥주 마케팅 이사(사진=백소아 기자)

남은자 OB맥주 마케팅 이사(사진=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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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셰프한테는 밥 몇 그릇 먹냐고 안 물어보거든요. 그런데 다들 저한테는 술 몇 잔이나 마시냐고 꼭 물어봐요."

남은자(43) OB맥주 마케팅 이사에게 '주량'은 빠지지 않는 단골 질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주류(酒類)는 남성이 주류(主流)인 산업이다. 생산부터 마케팅, 영업까지 모든 분야의 중심에 '술 마시는 남성'이 있다.
남 이사는 OB맥주 83년 역사상 첫 여성 팀장이자 첫 여성 임원이다. 2007년 마케팅 부문 신제품 전략 및 개발팀장으로 입사해 2014년 이사로 임명됐다. 현재 카스, OB, 카프리 등 OB맥주에서 생산하는 모든 브랜드들의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다. 높디 높은 유리천장을 뚫고 OB맥주의 역사가 되었으니 '도대체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 지' 남들이 궁금해 할 만하다.

서울 강남구 OB맥주 본사에서 남 이사를 만났다. 주량부터 물었다. 그는 "사실 술을 잘 못한다"며 "얼마나 마시냐고 물어보면 '많이는 못 마시고 오래는 마십니다'고 대답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최초의 여성 임원' 타이틀을 거머쥔 비결은 무엇일까. 남 이사는 "이길 수도, 낄 수도 없는 게임은 과감히 버렸다"고 말했다.

"여자여서 남자만큼 술을 마시지 못해요. 남자들과 사우나도 갈 수 없어요. 이런 게임에서 승자가 되려고 노력했던 시간들은 저에게 가치가 없었죠. 단 제가 이길 수 있는 게임으로 갔어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안 될 일을 되게 하고, 갈등을 중재했죠. 승자가 될 수 있는 게임에 뛰어드니 저에게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득이었어요."

남 이사는 소위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는 뜻의 신조어)에 능한 사람이었다. 거저 얻은 능력이 아니다. 삼성전자, 필립스, OB맥주 등 남자가 중심인 곳에서 수백 번 부딪히며 단련한 결과였다.

"여성 리더라 오히려 유리한 측면도 있었어요. 남자가 사냥감을 쫓는 '목적 지향형' 인간이라면 여자는 '관계 지향형'이에요. 늘 대화의 행간을 읽으려 애쓰죠. 커뮤니케이션과 스토리, 콘텐츠가 절대적인 마케팅에서 여자가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예요."

남은자 OB맥주 마케팅 이사(사진=백소아 기자)

남은자 OB맥주 마케팅 이사(사진=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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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까지 하이트에 밀려 만년 2등이던 OB맥주는 남 이사가 입사한 지 4년이 지난 2011년 판세를 뒤집었다. OB맥주가 맥주시장점유율 51.82%를 기록하며 48.18%에 그친 하이트를 처음으로 따돌렸다. 2013년 60%를 넘어선 OB맥주는 지금도 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남 이사는 신제품 전략 및 개발팀장으로 입사한 뒤 5년 동안 매일 아침 '깡맥주'를 마셨다.

"전 세계에서 매일 신제품 100개가 생겨요. 100개는 다 못 마시고 그중에 4~5개를 입맛이 가장 예민한 아침에 꾸준히 마셨죠. 맛도 봐야 하고, 패키지(포장)도 살펴야 하고, 트렌드도 파악해야 하니까. 맥주업계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습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남 이사는 "마케팅에는 소비자를 끌어오려는 집요함이 필수"라며 "좋게 말하면 '열성', 나쁘게 말하면 '극성'인 내 성격이 마케팅에 안성맞춤이었다"고 말했다.

남 이사가 마케팅의 길로 들어선 과정은 꽤나 극적이다. 1996년 삼성전자 재무팀에 입사한 그는 10개월간 전국 사업장을 돌며 관련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남 이사는 "마케팅이 뭔 지도 모르면서" 마케팅이 하고 싶었다. 인사부에 가서 부서를 옮겨달라 요청했다.

"첫 대답은 'NO' 였어요. 영업경력이 있어야만 마케팅 부서로 갈 수 있다더라고요. 사실 속뜻은 '남자 아니면 안 받는다'였죠. 과감하게 영업직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대졸여성이 영업에 뛰어드는 건 드문 일이었어요. 1년 동안 영업을 한 뒤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게 됐죠."

남 이사는 이 선택을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말했다. 그는 카세트 플레이어 '마이마이'와 '미니미니' 브랜드 매니저로 근무하다 2000년 필립스 코리아로 자리를 옮겼다.

2003년에는 프랑스 패브릭ㆍ원사 회사인 DMC의 한국 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 '십자수 돌풍'의 중심에 섰다.

"모든 여성 잡지로 하여금 십자수를 다루게 했어요. 당시 드물던 드라마 간접광고나 온라인 판매도 시도했죠. 선물용으로 십자수를 하는 국내 소비자들 특성을 감안해 수를 놓기만 하면 되는 쿠션, 열쇠고리 등의 반제품을 내다 팔았어요."

그 결과 DMC의 아시아 지역 매출 중 무려 80%가 한국에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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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이사는 직장생활 10여년 만에 세 가지 착각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첫째, 삶은 개인전이 아닌 단체전이라는 거예요. 나만 발 동동 거리며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네트워크가 중요해요. 둘째, 인생은 100m 달리기가 아닌 42.195km를 뛰는 마라톤이라는 것. 겨우 100m 달리고 아무도 나에게 '잘했어'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고 절망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럴 땐 내가 나를 칭찬해주면서 마라톤을 뛸 준비를 하면 돼요. 셋째, 회사생활은 올림픽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직장인은 성과뿐 아니라 리더십, 네트워크, 업무추진력 등 다방면의 능력으로 평가받아요."

남 이사는 OB맥주 동료들과 함께 오래토록 단체전 마라톤을 뛸 생각이다. 그는 지금 맥주와 사랑에 빠졌다. 맥주의, 맥주의 역사를, 맥주의 인류학적 의미를 알아갈수록 맥주의 맛이 더 깊고 오묘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맥주의 역사는 4000년도 더 됐어요. 4대문명 발상지인 유프라테스강 인근에서 우연히 탄생했죠. 소주가 '위로'주라면, 맥주는 '축하'주예요. 상사한테 깨졌을 때 소주를 찾는 반면 승진을 했을 땐 맥주를 마시죠. 달래주는 것보다 이왕이면 축하해주는 게 낫지 않나요? 한 마디로 전 인류가 4000년 전부터 즐긴 문화유산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중이랍니다."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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