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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 미로 특별전①] 91일간의 '꿈의 미로'

최종수정 2016.06.24 09:00 기사입력 2016.06.2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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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회화·조각·도예 작품 264점 전시

야수파·입체파·초현실주의 등
근대 미술사조 두루 섭렵한 미술가
화려함과 명료함, 독창적 색채 조화
카탈루냐 대지에 대한 깊은 경외심
다양한 예술적 상상력의 뿌리로


[호안 미로 특별전①] 91일간의 '꿈의 미로'

[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호안 미로(Joan Miro)는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미술가라고 한다. 그에 대한 사랑은 파블로 피카소나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하는 정서와는 매우 다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미로가 평생에 걸쳐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로 압축되는 스페인의 예술혼을 지켜 나갔던 데에 있을 것이다. 미로는 화려하고 명료한 색채, 자연과 인체를 상징화한 기호로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들을 하나의 사조로 정의하긴 어렵다. 미로의 그림에는 야수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가 모두 스몄다. 그는 주류를 쫓지 않았다. 그럼에도 근대 미술사는 결코 그를 주변 작가로 취급하지 않는다. 미로는 노년에 접어들수록 더욱 독창적이었고 회화뿐 아니라 조각과 도예로 영역을 넓혀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투영했다.

◆ 카탈루냐 미로는 1893년 4월20일 스페인 카탈루냐주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석과 시계를 만들었고 외할아버지는 가구를 팔았다. 미로는 이들의 손재주를 물려받았다. 타고난 관찰력과 감수성으로 일곱 살부터 매일같이 초상화와 정물화, 풍속화를 그렸다.

카탈루냐는 미로의 예술적 상상력의 근원이었다. 거대한 자연과 항구 도시만의 개방적 문화를 지닌 곳. 피카소와 달리, 안토니 가우디, 안토니 타피에스 등 수많은 예술가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카탈루냐는 외가가 있는 마요르카 섬과 더불어 미로에게 최초의 양식과 색감을 선사했다. 어린 미로의 크로키 화첩에서는 곤충과 새, 나무, 뱀과 성당, 물레방아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땅의 찬미자'였다. 훗날 미로는 이렇게 말했다. "카탈루냐적 성격은 마요르카나 또는 스페인의 다른 지방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땅과 매우 밀접하다. 땅, 땅, 땅은 나 자신보다 더 강하다. 환상적인 산들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하늘도 그렇다."

후안 페루초는 책 '호안 미로와 카탈루냐'에서 "미로는 출생 지역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대표적 작가"라며 "카탈루냐와 미로는 운명이며 이 관계는 영속될 것"이라고 썼다.

◆ 프란시스 갈리의 미술학교 미로의 부모는 아들의 미술 공부를 반대했다. 그래서 미로는 열네 살에 상업학교와 미술학교를 같이 다녀야 했다. 그는 부모의 뜻에 따라 열일곱 살에 상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곧 병에 걸렸고 부모의 별장이 있는 몬트로이그 농장으로 떠났다. 올리브 나무와 넝쿨에 둘러싸여 지내며 미로는 자신이 할 일은 오직 그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1912년 프란시스 갈리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갈리는 미로의 눈을 가리고 손의 감각만으로 사물을 관찰해 느끼고 그리게 했다. 갈리는 또 미로가 음악과 시를 공부하며 풍요로운 감각 세계를 기를 수 있게끔 가르쳤다. 이론에서 벗어난 갈리의 교육방법은 미로가 실험적이고 자유로우며 독창적인 표현을 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

[호안 미로 특별전①] 91일간의 '꿈의 미로'

◆ 초현실주의 1917년 미로는 프랑스 파리에서 온 다다이즘 화가 프란시스 피카비아를 바르셀로나에서 자주 만났다. 다다이즘은 과거의 모든 예술 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는 문화 운동. 미로는 피카비아를 통해 유럽에 피어난 새로운 사조들을 접하며 스페인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1919년부터 파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갔다. 파리에서 동향인 피카소를 만나 그의 입체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편 시인 트리스탕 차라, 피에르 르베르디와 교류하며 다다 운동에 참여했다.

미로는 1924년 시인이자 초현실주의 주창자인 앙드레 브르통을 만났고 같은 계열의 시인, 화가들과 교류했다. 섬세하면서도 빽빽하던 그림이 점차 마음을 따라 느슨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미로는 마침내 1925년 프랑스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첫 집단 전시에 조르조 데 기리코, 파울 클레, 피카소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미로의 초현실주의는 1940년쯤 완전히 숙성됐고 그는 자주 '초현실주의 화가'에 속하지만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라는 울타리 안에 갇히지 않는다. 미로 그림의 근간은 대지에 있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포함해 야수주의와 다다이즘, 입체주의를 수단으로 대지의 신비적 특질을 종이에 담아냈다.

미로는 작가로서의 완숙기를 마요르카 섬에서 보냈다. 1956년부터 1983년 12월25일 성탄절에 숨을 거둘 때까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에너지로 독창적 작품들을 만들어나갔다.

[호안 미로 특별전②] 묘사부터 캔버스 태우기까지
[호안 미로 특별전③] 가우디를 위한 오마주

임온유 기자 io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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