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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이유없는 죽음이 만든 공포, 세월호 참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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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
슬금슬금 전진하며 스토리 전개 '추격자' 스타일과 다르지만 살인에 무덤덤한 우리 사회 지적한 감독 의도는 이번 작품에도 이어져
"시나리오를 완성할 무렵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어요. 더 잘 찍고 싶었죠. 같은 이야기니까"

영화 '곡성' 스틸 컷

영화 '곡성'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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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모처럼 국내산 대어가 스크린에 걸렸다. 나홍진 감독(42)의 신작 '곡성'이다. 국내 영화에서 보기 드문 '오컬트 영화(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영화)'에 다양한 장르를 섞어 실체가 불분명한 폭력의 근원을 찾는다. 다양한 의미를 곁들여 심오한 맛을 낸다. 나 감독은 전작 '추격자(2008년)' 등에서 과감한 폭력 묘사와 빠른 속도감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곡성은 거의 정반대다. 슬금슬금 전진하면서 힘을 축적해 긴장을 고조시킨다.

평온한 농촌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난 뒤 연이어 괴이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모든 사건이 외지인 때문에 일어났다고 수군댄다. 그런데 그때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을은 평온을 되찾는다.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술상의 안줏거리로 오르내린다. 결국 곡성은 추격자의 연장선이다. 나 감독은 "살인사건을 농담하듯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홧김에 만든 영화가 추격자"라고 했다. 곡성에서 '외면하는 주체'는 경찰 종구(곽도원)다. 사는 곳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일찍 출근하기 싫어 불평한다.
영화 '곡성' 스틸 컷

영화 '곡성'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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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현장은 처참하다. '구한말(舊韓末)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하다. 구석에서 돼지가 꿀꿀거리고 곳곳에 물이 고였다. 천연두와 콜레라가 창궐하는 곳이다. 사진에 찍힌 인물들이 죽어나간다는 설정은 샤이에 롱(Chaille Long) 미국 공사관 서기의 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롱이 아이들을 촬영한 사진을 잃어버렸는데, 며칠 뒤 사진 속의 아이들이 잔혹하게 살해돼 시신이 훼손된 채로 발견됐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사진을 찍히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었다.

수수방관하던 종구는 딸 효진(김환희)이 피해자들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자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한다. 외지인의 집을 찾아가고, 효진을 치료하려고 100여년 전에 천연두와 콜레라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랬듯 무속인 일광(황정민)을 불러들인다. 그의 행동에는 강한 부성애가 있지만 진실한 믿음은 없다. 스스로 인지하진 못한다. 동료 경찰의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보고 비아냥거린다. "모가지에 이거 뭐여 이거."

영화 '곡성'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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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면서 마을은 지옥으로 변해간다. 마을은 나 감독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이다. "인간의 존재에 이유가 있다면, 죽음에도 이유가 있어야 해요. '그냥'이란 있을 수 없죠. 그런데 사람들이 무작위로 죽고 있어요.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시나리오를 완성할 무렵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어요. '더 잘 찍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요."
오컬트 영화의 고전 '엑소시스트(1973년)'는 어린 소녀에게 악령이 깃든 다음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이 영화의 탄생 배경에 서구사회의 오컬트 열풍이 있다. 민권운동과 시대에 대한 반항이 격렬한 가운데 한편에서는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이 쾌락과 염세주의에 빠졌다. 마약에 손에 댔고 명상과 요가에 투신하고자 인도로 몰려갔다. 극단적으로 악마주의를 신봉하는 이들도 있었다. '악마의 씨(1968년)'를 연출한 로만 폴란스키(83)가 이듬해 그들 손에 아내를 잃은 건 현실로 확장된 공포였다.

영화 '곡성' 스틸 컷

영화 '곡성'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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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은 암담한 현실을 광각렌즈를 이용해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홍경표 촬영감독(54)은 거의 모든 샷에 입체감을 덧입혔다. 공간을 절묘하게 분리하는데, 곡성으로 가는 꾸불꾸불한 산길, 마을의 문과 골목길 등이 칸막이 역할을 한다. 그래서 드넓은 공간인데도 폐쇄적인 느낌을 준다. 시퍼런 새벽 공기와 거센 빗방울도 한 몫 한다. 황정민은 이렇게 다 차린 밥상에서 숟가락을 제대로 든다. 특히 굿판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살을 날리는 연기는 '달콤한 인생(2005년)'에서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놀리는 백 사장 이상의 강렬함으로 다가온다. 사실적인 묘사까지 더해져 이 영화와 현실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두려움을 안긴다. "절대 현혹되지 마소." 이 말이 "가만히 있어라"로 전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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