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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칼럼]파리테러와 광화문 차벽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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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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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주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참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테러공격이 벌어진 곳은 바타클랑 극장이었는데, 이 극장이 다른 곳이 아닌 볼테르가에 있었다는 점은 이번 테러 사건의 한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아버지로서 무엇보다 '관용(톨레랑스)'을 지금의 프랑스 공화국, 나아가 문명사회의 중요한 시민 덕목 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 볼테르를 기리는 거리에서 관용에 대한 정면공격, 관용을 부인하는 테러가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관용의 거리에서 불관용, 반관용의 야만이 행해진 아이러니가 연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러니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드러냈다. 즉 불관용의 테러를 저지른 이들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강력한 무력을 동원했지만, 또 상당한 정도로 그런 의도가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근본적으로는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의존했던 것은 무력(武力)이었고, 비이성적 광신이었으며, 한순간 두려움을 자아내지만 다음 순간 경멸감을 일으키는 위협이었다. 그들에겐 무력과 완력(force)은 있었으나 진정한 '권력(power)'은 없었다. 20만명의 용병에다 고성능의 살인무기들, 꽤나 방대한 영토를 가졌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은 강제력으로서의 힘(force)일 뿐, 상대방을 설복하고 동의를 얻는 능력으로서의 힘(power)이 아니었다. 그들의 힘은 결국 강력해질수록 오히려 약해지는 자기파괴적인 힘일 뿐이었다. 이들 테러집단이 무서우면서도 실은 두려울 것이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무력'의 과시가 같은 날 한국의 서울 한복판에서도 벌어졌다. 이날 광화문을 비롯해 서울의 한복판에서는 시민들을 차벽으로 막고 무장 경찰들로 에워싼 풍경이 펼쳐졌다. 물 샐 틈 없이 둘러쳐진 차벽은 얼핏 견고해 보였다. 그 차벽은 마치 이날 시위의 큰 이유가 됐던 교과서 국정화에 담긴 생각, 즉 '단 하나의 역사'로써 '다른 많은 역사들'을 배제하겠다는 완강한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테러집단의 무력이 상대방을 절멸시키겠다는 적대감의 표출이었다면 광화문의 차벽은 상대방의 얘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부감의 구축(構築)이었다. "차벽의 설치는 위헌"이라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차벽 설치의 정당성에 대한 시비보다는 차벽 앞에서의 물리적 충돌에 대한 공방으로 사태의 본질을 흐리는 몰이성ㆍ반합리적인 언사들의 지원에 힘입어 이 기이한 구조물은 더욱 철옹성이 된 듯했다. 그러나 그 차벽 또한 견고할수록 허약해지는 것이었다. 권력이 결여된 무력으로 쌓아 올린 허약한 성벽이었다. 허약할 뿐만 아니다. 그 차벽은 그 안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는 성벽으로 세워진 애초의 의도와 달리 실은 자신들을 스스로 '섬'에 가두는 창살이 되고 있다.

어제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일생으로부터 '차벽 안의 사람들' '차벽을 세우는 사람들'이 얻을 큰 교훈도 바로 그 점에 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의 평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꼽으라면 아마 고인 자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1992년 드디어 대망의 대통령이 됐을 때를 들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야당의 지도자로서 수난을 겪을 때를 꼽을 것이다. 예컨대 그가 가장 힘겨운 고난을 당했을 때, 즉 제1야당 신민당 총재였던 1979년 8월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때 그들 편에 섰다가 의원직에서 제명됐던 순간이다. 폭압적 정치권력의 기세가 가장 맹렬했던 때였고, 그가 가장 위태로워 보였던 때였다. 유신의 권력이 그를 둘러싸고 옥죄어왔을 때 그는 포위망에 갇힌 포로로 보였다. 그러나 결국 강했던 것은 그 가련한 약자였고, 결국 약했던 것은 그 기세등등했던 강자였다. 진정한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지, 강해 보이는 듯한 무력은 결국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던 것이다. 고인과 한때는 맞섰으나 결국 한 몸으로 합쳐진 지금의 집권세력이 그의 빈소에서 새겨야 할 한 교훈이 여기에 있을 듯하다.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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