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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희의 전시포커스] 당신, 엄마를 버리러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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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영상 작품 부분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영상 작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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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도시풍경 속 고려장 영상
개발논리에 터전 잃고 쫓겨난 개인 상징
다수의 시대, 개인의 부활을 꿈꾸다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현실의 바위에 한 발을 굳건히 내딛고 나머지 한 발은 흐르는 물의 표면에 살포시 담그며 존재를 성찰하다."
작가 유비호(45)가 자신의 블로그에 포스팅한 짧은 메모다. 지난 9월에 적었다. '실존'은 그가 20년 동안 꾸준히 고민해 온 화두다. 그의 작업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적 현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삶의 가치 회복, 다수의 시대에 묻힌 개인의 부활을 추구한다. 요즘 시각적으로는 눈길을 끌지만 피상적이고 난해한 작품들이 많은데, 그의 작업은 현실을 기반에 둔 유의미한 주제와 함께 어렵지 않게 읽히는 까닭에 더 소중해 보인다.

유비호의 개인전이 열렸다. 개막일 전날인 11일 작가를 만나기 위해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성곡미술관을 찾았다. 그가 스쿠터를 타고 나타났다. 전시장 1층으로 함께 들어섰다. 여덟 개나 되는 다채널 영상이 벽에 걸려 있다. 흙더미가 쌓인 폐허, 아파트 건설현장과 재개발 지역, 인사동 골목길 등 각기 다른 장면들을 비춘다. 모든 채널 속에 도시의 생경한 장소에서 빠져나와 폐허로 도피하듯, 백발노인을 업고 절뚝거리며 걷는 한 남자가 있다. 과거의 '고려장'과 현재의 '도시풍경'을 오버랩했다. 주제는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산업화와 도시의 성장으로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고 버린 우리시대를 돌이켜 보게 만든다. 때때로 영상은 푸른 산과 사람형상을 한 바위도 보여준다. 바람 소리와 사람 음성도 들린다. 여백의 의미로 끼어 넣은 장치다.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영상 작품 부분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영상 작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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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영상 작품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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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미술관 1층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전시 전경

성곡미술관 1층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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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작가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김기영 감독의 1963년작 영화 '고려장'을 보았다. 마을 무당의 선동으로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버린 아들이 등장한다. 모자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당에게 현혹되지 않았다. 영화를 찍었을 때는 휴전선을 그은 10년도 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념의 시대였다. 이념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개개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영화"라며 "나도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맞닥뜨린 시대와 운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표현하려 했다. 당대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실존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했다. 채널들의 맞은편 바닥에는 투명한 비닐이 깔렸다. 전시장 벽의 귀퉁이에서는 강한 조명이 빛을 쏘아낸다. 작가는 "영상의 내용이 꽤 무겁기 때문에, 관람객들의 몰입도를 낮추기 위해 일부러 비닐을 깔았다. 밝은 조명도 마찬가지 용도"라고 했다.
작가가 지난 9월부터 2개월 동안 만난 인물 여덟 명을 인터뷰한 작업은 2층에서 만날 수 있다. '이너 뷰'(Inner view)라는 작품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테이블마다 구형 텔레비전 수상기 여덟 개가 놓였고, 브라운관마다 각각 다른 인터뷰를 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대구지하철참사', '형제복지원 사건', '씨랜드청소년수련원 참사', '용산참사', '세월호침몰사고', '춘천산사태' 등 대형 참사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과 희생자들의 가족이다. 이들은 참사에 대한 분노나 당시 사고에 대한 기억보다는 자신의 현재 생활과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작가는 "사고를 고발하는 방식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려 했다. 이들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고 , 세상을 떠난 가족들에 대해 갖는 연민과 슬픔, 애정을 보여주려 했다"며 "대부분 두세 시간씩 인터뷰가 진행됐다. 도중에 함께 울기도 하고, 편집하면서도 많이 울었다. 인터뷰를 하기 까지 쉽진 않았지만 꽤 호의적으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이너 뷰' 전시의 한 장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총무 박순이씨 인터뷰.

'이너 뷰' 전시의 한 장면.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총무 박순이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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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호 작가

유비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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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층에는 '이너 뷰' 작품 외에도 '풍경이 된 자', '안개 잠', '망향탑' 등의 단채널 영상도 곳곳에 설치됐다. 울창한 숲 안에 굵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한 남자의 뒷모습과 안개가 뿌연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 강화도 교동도에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쌓아 둔 돌탑 등이다. 남자는 이 시대를 견뎌내는 듯 느린 호흡으로 고요하게 생각에 잠긴 현자를, 여인은 망부석 설화의 도상을 빌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이를 상징한다. 또한 앞서 만난 장면처럼 남자가 할머니를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르고 있는,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모습을 다각도로 비춘 영상들이 있다. 작가는 "시대마다 분명 사람이기에 가지고 태어나는 운명이 있다. 하지만 영상에서 실제로 고려장이 이뤄지지 않듯이, 운명을 대하는 태도와 인생의 여정만큼은 개개인의 몫이기도 하다"고 했다.

작가는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1990년에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찾으려고 미대에 들어갔다고 한다. 회화가 아닌 영상에 천착한 이유에 대해, "나는 흑백, 컬러TV, 비디오, 그래픽 등 모두 영상방식을 섭렵할 수 있었던 세대에 속해 있다. 그 영향이 컸다. 기술적으로 카메라, 사운드 등 기계는 거의 만질 줄 안다. 영상에 나오는 배우 캐스팅과 같은 부분은 외부 피디와 상의한다"며 "영상은 시간성과 운율, 심리적 요소를 포착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라고 했다. 그는 "안개나 바다, 요즘엔 가려 있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 저편을 상상할 수 있는 곳에 관심이 많다"며 "앞으로 안개를 배경으로 정서적인 표현을 담은 작업을 남도에서 하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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