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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1명당 年3000건…한계에 이른 '재판 중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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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상고법원…법조계, 현재의 상고심제도 변화 필요성 공감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대법원 최종 판단을 기다려보겠다." 소송에 나선 이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1심과 2심에서 패소해도 대법원에서 '뒤집기 한판'을 기대하는 심리다. 하지만 앞으로는 최종심 판단의 주체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대법원은 '상고법원' 설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상고법원 설치는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문제다. 한국 사법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안이다

대법원은 '사건의 홍수'에 시달리고 있다.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대법관 1인당 연간 3000건의 사건을 담당한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대법관 14명 중 12명이 해마다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사건 하나 당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자료가 뒤따른다. 면밀한 분석과 법리검토를 통해 '최고법원'의 최종 판단이 내려져야 하지만 물리적 한계라는 현실의 벽에 막혀 있다. 2013년 대법원이 담당한 상고 사건은 3만6156건이다. 대법원 상고 사건은 1991년 1만건 수준이었다. 20년 사이에 3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대법원 사건처리 부담은 개별 사건 처리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민사 사건의 상고심 평균 처리 기간은 2011년 140일, 2012년 167일, 2013년 179일로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대법원. 사진=아시아경제DB

대법원. 사진=아시아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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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법령 해석을 통일해 법적 판단의 기준을 확립하는 게 본래 역할이다. 대법원 판례는 그 자체로 전국 법관들의 판단 기준이 된다. 대법원이 정책법원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는 것은 한국사회의 가치 기준 확립과 올바른 방향 설정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대법원은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의 경우 '전원합의체'를 열어 판단한다. 하지만 전원합의체를 통해 판단한 사건은 2011년 17건, 2012년 28건, 2013년 22건에 불과하다. 한해 3만6000건의 상고심 사건 규모를 고려할 때 0.1%도 되지 않는 미미한 수준이다.

게다가 상고심 판단이 꼭 필요하지 않은 사건이 대법원으로 넘어오는 것도 문제다. 항소심(2심) 판단을 대법원이 파기하는 비율은 2011년 5.2%, 2012년 5.7%, 2013년 6.5% 수준이다. 다시 말해 원심이 판단한 사건의 94~95% 정도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고 있다는 얘기다. 사건의 대부분은 원심과 똑같은 결과로 끝을 맺는데 시간과 돈, 인력의 낭비를 부르는 '장시간 재판'이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고심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얘기되는 대안은 여러가지다. 항소심이 끝난 사건의 상고 허가 여부를 사전에 결정하는 '상고허가제' 도입이 그중 하나다. 이 제도의 문제는 국민의 '3심제 선호'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도 상고허가제를 시행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지난 1990년 '국민 기본권' 제한이라는 폐해가 지적되면서 폐지된 바 있다. 이를 다시 부활하려면 여러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대법원의 상고심 사건 부담을 대폭 줄이는 제도적 개선책으로는 상고법원 도입 방안과 대법관 증원 방안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대법원은 상고심(3심)을 담당하는 별도의 법원을 만드는 상고법원 설치를 선호한다. 유능한 경력 법관들을 상고법원 법관으로 기용해 최종심을 담당하게 하자는 취지다.

대법원은 법령 통일이 필요한 사안이나 사회에 미칠 영향력이 중대한 사안을 중심으로 판단을 맡기는 게 기본 골격이다. 대법원의 한 판사는 "키코나 통상임금 등 국가·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있다"면서 "중요한 사안에 대한 정책적 판단이 필요할 때 깊이 있는 법률 검토가 이뤄지도록 제도적인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관들은 기본적으로 상고법원 설치에 동의하는 편이다.

이와 달리 대한변호사협회와 시민단체 쪽에서는 상고법원 도입보다는 대법관 증원을 선호하고 있다. 대법관이 현재 14명에서 30명 정도로 늘어나게 된다면 상고심 사건처리 부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대법관을 대폭 늘리게 될 경우 현재 법관 일변도로 구성된 대법원 구성을 뜯어고칠 수 있다는 포석도 담겨 있다. 재야 변호사 출신 대법관, 법학 교수 출신 대법관 등을 탄생시켜 다양한 시각과 인식이 대법원 판단에 녹아들게 하자는 의미다.

하지만 대법관이 대폭 늘어나면 대법관 전원이 참석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해야 하는 전원합의체 운영이 사실상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뒤따른다. 대법관의 판결 중 충돌하는 부분이 생길 가능성마저 안게 된다는 점에서 대법원은 부정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을 반대하는 것을 놓고 소수로 유지해야 '권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는 대법원이 자신들의 권위는 유지한 채 영향력은 더욱 확대하고자 대법관 증원보다 상고법원 설치에 힘을 싣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이 깔렸다.

대법원의 상고법원 홍보 포스터.

대법원의 상고법원 홍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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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법원은 상고심 제도 개선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봐달라고 주문한다. 특히 상고법원 도입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심혈을 기울이는 숙원사업이다. 양 대법원장은 2011년 9월27일 취임사에서 "패소한 측은 끊임없이 상소를 거듭하며 3단계의 절차를 다 거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오늘의 재판현실이다. 이로 인한 인적·물적인 낭비는 막대하다"고 지적했다. 상고제도 개선을 취임 때부터 강조한 셈이다.

상고법원 도입의 전제 조건은 사실심 강화다. l심과 2심이 담당하는 사실심이 충실하게 이뤄질 경우 법률심인 상고심 부담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는 논리다.

대법원은 사실심 충실화 제도 개선을 위해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마련했다. 대법원은 지난 7월 ▲소송비용에 산입되는 변호사 비용 현실화 ▲양형심리절차 개선 등이 담긴 건의문을 의결했다. 이러한 노력은 법조계에 보내는 메시지다.

사법부가 사실심 충실화를 위해 가시적인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니 상고법원 도입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달라는 의미다. 그러나 대법원 기대와는 달리 상고법원 설치에 대한 지지와 성원은 미미한 실정이다.

상고법원 설치는 기본적으로 법 개정 사안이다. 예산도 확보해야 하는 사업이다. 국회 동의를 구해야 하고 여론의 지원도 얻어야 한다. 법조계의 폭넓은 공감대도 필요하다. 대법원은 사실심 충실화와 상고심 심리단계별 정보 제공 등 사법제도 개선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민일영 대법관 후임자 추천 과정에서 대법원 최초로 '대법관 후보군 언론 공개'를 시도하는 파격 행보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대법관 다양화'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50대 남성 법관 출신이라는 기존의 '대법관 선발 공식'을 답습했다.

대법원이 다양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지만 상고법원 설치가 허용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법무부와 검찰이 우선 미온적이다. 국회 상황도 여의치 않다. 여당은 검찰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 반대기류가 엿보인다.

야당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대법원 판결 이후 '싸늘한 시선'을 보이고 있다. 형사사건 성공보수 무효 판결 이후 변호사들의 대법원 반발 기류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다. 대법원은 올해 정기국회에서 상고법원 설치 법안 통과를 희망하고 있지만 법조계 안팎의 냉랭한 시선이 달라져야 추진동력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고법원이 설치되면 사법부 의사결정 구조가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관료화할 가능성도 있다"면서 "대법원은 상고법원 설치를 요구하기 전에 다양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할 민주적 틀을 우선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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