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뉴스]'설왕설래'가 있는 풍경
어느귀성가족의 가상대화
설을 맞아 모인 가족들은 반가움과 서먹함을 동시에 느낀다. 따로 독립해 살다 간만에 애틋한 정을 나누는 기회지만 핵가족 생활에 익숙한 탓에 불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게 사실이다. 도착과 동시에 간단한 인사말을 뒤로 한 채 각자 스마트폰에 머리 숙이고 채팅이나 게임하는 것도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집안 어른에겐 당연한 강박처럼 뒤따른다. 이럴 땐 눈치 빠른 분위기 메이커가 뜨기 마련이다. 괜히 설날 떡값이 얼마였는지, 결혼은 언제나 할건지 같은 얘기가 나와 뜨악해지기 전에 말이다. 가장 좋은 '뒷담화' 대상은 역시 사회 전반의 이슈다. 가상의 대화를 들어본다.
-인성중시한다면서 인문학 줄이고
-월세 땜에 죽겠는데 연말정산에 멘붕
섣달 그믐 오후,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는 김모(68)씨가 옷 매무새를 다지며 한마디한다. "벌써 도착해서 제수 준비를 지 엄마랑 같이 해야 할 텐데, 끙. 누가 먼저 도착한다고 했소?" "점심 때가 지났으니 슬슬 오겠지요. KTX가 이번 명절부터 개통됐으면 우리 새끼들이 더 편하게 올 텐데…." 아내인 박모(65)씨가 되받는다. "괜히 서대전역을 들르네 마네 하더니 개통만 늦어진 꼴 아닌가 몰라." 김씨가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다. 때마침 서른 여덟 아들이 아내와 딸을 데리고 들어서며 "원래 3월쯤 개통한다고 했으니 서대전역 들르는 것과 개통일은 관계가 없어요"라고 선을 그었다. "그래도 다음 명절부터는 1시간 반이면 서울에서 광주까지 올 수 있다니 다행이죠"라고 분위기 전환용 멘트를 날린다.
"기름값도 많이 들 텐데 그래도 기차를 타고 오지 그랬느냐"며 김씨는 한발 물러선다. "기름값 많이 내렸어요. 이제는 ℓ당 1300원대도 많아요"라고 며느리가 나선다. "처가에 가는 교통편도 그렇고 차를 타고 오는 게 낫죠"라고 맞장구치는 아들에 이어 9살 손녀딸은 "아빠가 얼마 전에 연비 좋다는 외제차로 바꿨다"며 차 구경을 가자고 설레발을 친다. "국산차도 예전에 비하면 정말 좋아졌는데, 애국이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뭐하러…"라면서도 김씨 내외는 손녀 손을 잡고 나선다.
"시중에 팔리는 새 차 중에서 외제차가 20%까지 높아졌다던데 이 집도 결국 샀구먼. 아들 내외가 큰 기업에 다닌다더니 성과급 많이 받았나봐"라며 아는 체하던 이웃집 이씨네 아들 내외가 막 들이닥친다.
김씨 아들이 "아유, 말도 마세요. 연말정산에서도 토해낸 게 전보다 많은데 성과급도 예전같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찰나, 이씨 아들이 "기업들 성과급이 해마다 쪼그라들어서 먹고 살기 쉽지 않은데 공무원도 연금 줄인다고 난리니 걱정이에요"라며 볼멘소리를 냈다. 김씨는 "공무원이면 잘릴 걱정 없지, 노후 걱정도 덜 하지, 좀 줄인다고 난리라는 말이 나오는 게 맞기나 한지 모르겠네"라며 이죽거리자 일순 험악해지기 직전이다.
그 사이 서른 다섯인 김씨 딸의 호들갑에 다시 부드러워지나 싶더니 "언니는 일찍 와서 엄마 일손 좀 덜어드렸나 몰라" 하며 첫마디부터 시누이 역할이다. 김씨는 "어여 집에 들어가 엄마한테 인사부터 하자"고 이씨네와 떨어져 집안에 들어선다. 과년한 딸은 금세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다. "선생님이면 뭐하나, 결혼도 안 하고…. 남자친구는 언제 데려올 거냐"고 다그치는 엄마의 첫마디에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하다. "누구처럼 갑질다운 갑질도 못하고 고향 집에서 처절하게 을로 당하는구나" 하며 작은 방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일찌감치 세배를 마치고 차례까지 마친 아침은 부산하다. 아침 밥을 먹는 자리에서는 여지없이 정치 얘기가 나온다. "총리가 바뀌었으니 좀 달라지겠지. 그나마 다행이야. 이번에도 총리 인준이 되지 않았으면 어떡할 뻔 했어." 아버지의 주제발표에 바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다. "경제도 어려운데 정치는 더 흉흉해서 참 걱정입니다. '준비된 총리'입네 '해명 자판기'입네 떠들더니 이완구 총리도 참 문제가 많다는 게 드러났으니, 앞으로가 또 문제네요." 며느리는 "정치 얘기하다 친정에 못 갈까 걱정이네요. 여기서 좀 정리했으면 좋겠어요"라고 차원이 다른 댓글을 달자 시누이가 무조건반사 형태로 나선다. "아침 먹는 자리에서 떠날 걱정이나 하고, 오빠는 갈 자리가 많아 좋겠수." "또 갑질이냐. 우리 가족도 얼굴만 비치고 서울 가야 돼. 전세계약이 이달 말로 만료되는데 8000만원 안 올려주려면 월세로 50만원을 내라고 한다. 두 사람 벌지만 집을 사기까지는 하세월이겠다." "그놈의 집값은 왜 그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니. 벌어서 그 돈 대느라 허리가 휘겠구나." 엄마의 걱정이 고조될 즈음 "난 아직 대학 등록금 갚을 게 조금 더 남았어요"라고 딸의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곧 일어서야 하는데 고모부 내외가 들이닥친다. 오랜만에 뵙는지라 쉽게 떠나지 못하는 며느리는 속이 타지만 아버지는 느긋하시다. "그동안 별고 없었지? 그런데 이놈이 빨리 취업을 해야 할 텐데 그게 걱정이구나"며 고모부 아들에게 세뱃돈을 듬뿍 건넨다. "옆집 아들처럼 공무원 준비라도 하는 게 어떤지 모르겠구나"며 충고를 건네지만 당사자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경이다. 딸내미가 소방수 노릇을 한다. "모든 게 정치인들의 잘못이에요. 일자리 창출에 힘써야 하는데 허구한 날 정쟁이나 일삼고 자기사람 높은 자리에 앉히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청년백수가 일갈한다. "인문계만 파고들었는데 경기가 안 좋다 보니 인문계 전공자한테는 취업 문턱이 너무 높네요. 근데 정부는 앞으로 인성을 중시하겠다고 하면서도 대학에서는 인문학 전공을 아예 줄이겠다고도 하네요. 대체 뭐가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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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갈 길이 멀어서 먼저 일어납니다." 아들 내외가 딸아이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넨다. "요새 안개인지 초미세먼지인지 앞이 잘 안 보이니 운전 조심하거라. 영종대교 106중 추돌사고 때도 원인이 과속운전인 것 같더라. 항상 안전이 제일이다." 엄마의 당부는 손녀딸로도 이어진다. "너희 어린이집은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안 좋은 일 있거든 엄마한테 꼭 말씀드려야 한다." "걱정마세요. 안녕히계세요"라는 또랑또랑한 손녀의 인삿말에 초등학교 교사인 며느리의 똑부러진 목소리가 이어진다. "어린이집에 선생님도 충분해야 될 텐데, 여건도 개선해야 될 것 같아요." 아들 내외를 보내며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아버지도 한마디 보탠다. "복지 과잉이믄 뭐 나태해져? 썩을, 나태해져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며 딸아이한테 혼잣말 한다.
"어서 다녀가 집에서 독일 분데스리가 '코리안 더비' 같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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