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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남기면 넉넉하다, 여유(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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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이 말은 삶을 관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餘)는 남는 것이고 유(裕)는 넉넉한 것입니다. 사실 뒷말은 군더더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으면 저절로 넉넉하니까요.

말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상황이야?" 이 때의 여유는 시간적인 넉넉함을 의미합니다. 남은 시간이 없는데 그렇게 뜸을 들이고 있느냐는 힐난입니다. 차 한 잔을 하면서 여유를 즐겨라. 이것도 너무 바쁘게만 살지말고 마음을 부려놓을 여지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조금 여유를 두고 잘라." 이때의 여유는 공간적인 여유입니다. 너무 각박하게 싹둑 자르지 말고 넉넉하게 자르라는 얘기입니다.

"그 친구는 여유 있게 살더라." 이것은 다중의 의미가 생겨납니다. 그 친구가 한가롭게 산다는 의미도 되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다는 얘기도 됩니다. 뭔가 쫓기고 사는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더라는 얘기도 되죠. '가난해도 여유 있게 산다'는 말은, 가난이 그의 마음의 평정을 깨지 않아, 없으면 없는 대로 넉넉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여유를 관통하는 뜻은, 남는 것이 있어 넉넉하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남는 것은 사실 '필요없는 것'과도 통하는 것입니다. '여유'라는 말은 '필요없음의 필요'를 역설하는 말입니다. 필요없음의 필요없음은 동어반복이니, 필요없음의 필요는 역설(逆說)입니다. 필요없음이 왜 필요한가. 필요없음은 장차 필요함에 대한 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없어도, 현재의 일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차후 무슨 일이 생길 때 그것이 필요할 수 있기에, 여유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많은 목표와 강박과 질투와 슬픔과 근심과 고통은, '여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도 없을 부(富)에 대해 미친 듯이 동경하고, 돈 몇 푼에 실성하고 사람을 죽이고, 엄친아를 찬미하면서 슬그머니 미워하는 것도 모두 여유의 이미지에 환장하는 탓입니다.

우리가 그 질곡과 각박을 벗어나, 마음의 한적함을 갖고자 하는 것, 옛사람들이 벼슬을 때려치우고 한사코 산 속에 파묻히고자 했던 것. 생각이 만들어내는 평화의 비밀. 감정이 몰아붙이는 생에서 한 걸음 이탈하고자 하는 마음. 이 모두가 여유의 동경입니다.

'필요없는 것'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의미는,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장식들, 우리의 모든 허영들, 우리의 모든 형식들, 우리의 수많은 축제들, 우리의 다양한 일탈들, 우리의 헛된 꿈들, 우리의 수많은 보석들, 우리의 문화콘텐츠들, 우리의 영화와 소설과 신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사는데 굳이 필요없는 것들입니다. 필요없는 것이 더 비싸고 더 귀하고 더 오래 가고 더 치명적입니다.

여유라는 말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 말을 '남는 것이 있어 넉넉하다'고 생각하지만, 발상을 바꾸면, '남기면 넉넉하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이 있어서 남기는 게 아니라, 남기면 남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여유없는 공간도 여유롭게 쓰면 남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0년 안쪽의 시간 속에서 전쟁을 치르는 삶도 여유롭게 쓰면 넉넉한 시간입니다. 그 속에 사랑을 넣고 그 속에 고마움을 넣고 그 속에 미안함을 넣고 그 속에 믿음과 진정성을 넣으면 시간이 길어집니다.

재물의 여유, 혹은 삶의 조건들의 여유 또한 그러합니다. 스스로가 가난을 기꺼워하면 가난이 헐겁도록 여유롭다는 옛 말씀이 그러한 것입니다. 나누면 여유로워진다는 뜻도 그러한 생각의 연장일 것입니다. 마음이 재물이고 태도가 재물이고 솜씨가 재물이고 그 사람이 재물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면, 삶의 여유없음이 어느 정도는 가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유와 여유없음이 사회적인 모순으로 커지고, 누군가의 농간이 누군가의 여유를 탈취하고, 여유와 여유 없음의 차이가 지나쳐서 세상의 고통이 되는 상황까지, 여유롭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유가 단지 생각의 차이를 벗어나, 탐욕과 무책임과 정글의 질서 때문에 깨지는 것이라면, 우린 여유의 기본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하겠지요. 남기려고 애써도 남길 것이 너무 없는 그 자리에 선 사람에게, 이 여유론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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