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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정신 담긴 '서예', 취미로라도 배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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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건 선생.

정하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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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대가 정하건 선생, 팔순기념전 열어
40년 이상 인사동 지키며 서예 부흥 염원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70~80년대만 해도 중국이나 일본에서 글씨 꽤나 쓰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참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바뀌었죠. 동양의 정신문화가 '시·서·화'에 담겨있지 않나요? 서예 문화가 다시금 부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인사동을 떠나지 않고 있어요. 취미로라도 사람들이 서예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서울 인사동에서 서예를 공부하는 서실을 찾기란 예전만큼 흔치 않다. 골동품과 동양화를 비집고 서양화 위주의 현대미술이 인사동을 점령하면서 서실 역시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남아있는 서실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이 중엔 40년 넘게 인사동을 지켜온 서실이 있다. 인사동길 대로변 칼국수집 건물 4층에 위치한 송천서회다. 지난 3일 저녁 7시께 찾은 서실에는 15평 남짓 되는 공간에서 직장인 너댓명이 먹물 머금은 붓으로 화선지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작업실 안쪽으로는 이들의 스승인 송천(松川) 정하건 선생의 사무실이 자리해 있다.

사무실에서 정하건 선생을 만났다. 각종 서예관련 책들과 글씨 작품들, 벼루와 붓들이 수도 없어 묵향이 진동했다. 정 선생은 여전히 밥 먹고 잠시 쉬는 일 말고는 하루 종일 글씨를 쓰고 가르치고, 책을 보는 일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오랜 수련과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서예를 평생 해왔기 때문인지 선생의 몸과 얼굴은 굉장히 말라 보였다. 그러나 눈빛은 살아있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로 서예가인 정 선생은 웅강한 육조체를 기본으로 예서, 해서, 전서 등 모든 서체를 두루 섭렵한 대가다. 추사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꼽히는 검여 유희강으로부터 한문 서예를 사사하고, 갈물 이철경에게 한글서예를 배웠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최고상인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두 번 씩이나 수상한 이력이 있다. 대표작으로는 한글과 한문을 병용해 작성한 9000여 자에 이르는 대작인 조계사 '사적비'를 비롯해 해인사 '자운대율사비문', 임경업장군 묘역정화비문 등이 있다. 그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과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에게 서예를 가르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7년간 자신의 글씨 스승이 됐던 정 선생에게 이 회장은 "제 2의 추사가 되시겠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송천 선생 역시 가장 존경하는 서예가로 '추사'를 뽑고 있다. 그의 삶은 추사의 글씨를 모방하고, 연구하며 살아온 세월이기도 하다. 정 선생은 "추사의 힘찬 필맥을 숭모한다. 거기에 우아한 멋을 풍기는 나의 개성을 담아 글씨를 쓰고자 했다"고 고백했다.
정 선생이 서예로 인생을 살아온 데에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고향 연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종이가 귀했던 시절 할아버지가 분판에 먹으로 글씨를 써 주면 그대로 따라서 몇 번이고 물걸레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했던 시절이지만 주경야독하며 공부했고, 대학 1학년 때 한글로 독립선언서를 썼던 작품이 국전에 입선했다. 하지만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국전에서 입선과 낙선을 반복하다 최고상을 타기까지는 24년이 걸렸다. 그런 가운데 서예가 유희강의 인사동 서실을 이어받아 1973년 송천서회를 만들었고, 지금껏 제자들을 길러오고 있다. 또한 매년 제자들의 작품으로 기획한 서예그룹전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50여명이 그의 문하생으로 서예를 배우고 있다.

그런 송천 선생이 올해 팔순을 맞아 개인전을 열고 있다. 10년마다 한 번씩 자신의 글씨를 한데 모아 보여주는 전시다. 서른 살 개인전 이후 여섯 번째다. 행서, 해서, 전서 등 선생의 원숙한 서예관이 깃든 다양한 서체의 작품 130여점이 나왔다. 우리나라 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노산 이은상의 '조국강산'을 2700여자의 글씨로 써 내려간 대작 부터 '호현낙선(好賢樂善, 어짐을 좋아하고 선함을 즐긴다), '지고지순(至高至順,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함)', '좌금우서(左琴右書, 거문고와 책을 늘 곁에 두고 즐긴다)' 등 송천의 최신작들이다. 한글은 물론 한문과 국한문 혼용체 글씨들이 섞여 있다. 작품들을 보면 '사람과 글은 세월이 흘러야 갖춰진다'는 '인서구노(人書俱老)'를 실현하고 있는 노장의 혼이 느껴진다. 그는 "10년 후에 90세가 되는데, 그 때는 전각작품을 100여 점 내보이고 싶다.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100세전'도 하고 싶다"고 했다. 11일까지. 인사동 한국미술관. 문의 02-779-6318.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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