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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태어남과 죽음 사이(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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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은 생(生)으로 나오는 것(出)이고, 사망은 죽어서(死) 없어지는 것(亡)이다. 정확히 말하면 출생은 생명이 생겨나는 수태(受胎)의 순간이 아니라,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자라나, 자궁을 찢고 나오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므로 생 자체의 시작이라기 보다는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 인간은 두번 탄생하는 셈이다. 한번은 생명이 생겨나는 탄생, 그리고 또 한번은 세상에 태어나는 탄생. 인간의 삶의 스케줄이라 할 수 있는 운명 또한 생명탄생과 세상탄생의 두 가지 시점에 모두 영향을 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별의 운행에 따른 음양오행의 운명(사주팔자)은 물론 세상탄생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왜 이렇게 두번 탄생하도록 설계해놓았을까. 생명을 모체에서 인큐베이팅하는과정은 왜 필요했을까. 복잡한 생명체를 만만치 않은 생존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려면, 조물주도 10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산다는 일이 그만큼 어렵고, 조물주의 공력 또한 그만큼 많이 들었다는 얘기다. 우린 수태일을 생일로 잡지 않고, 출생일을 생일로 잡는다. 세상에 유통되는 '나'는, 태어나고난 다음부터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옛 나이 계산 체계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저 수태 지점을 고려해 한 해를 더 잡아준다. 영혼은 언제 육신에 깃드는가. 이것을 판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수태될 때 그것이 깃든다는 쪽에 가깝다. 그러나 조물주가 인간을 세공하고 있는 임신의 어느 지점에 그것을 불어넣을 수도 있고, 또는 출세(出世)하기에 임박하여 그 소프트웨어가 깔릴 수도 있을 것이다.
탄생이 두번인 것처럼 죽음도 사실은 두번이다. 한번은 '숨지다' 할 때의 표현처럼 목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육신의 형체가 모두 소멸되어 사라지는 신망(身亡), 혹은 신멸(身滅)의 시점이다. 그러나 우린 육체가 사라지는 지점에 대해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에서 생명체로 존재하던 것이 그 기능을 다하는 순간을 죽음으로 생각한다. 영혼의 소멸 또한 그 시점에 대해 알기 어렵다. 목숨을 다하는 순간, 소프트웨어도 완전히 꺼지는 것인지, 오랜 믿음처럼 일정한 기간 동안 그 기능은 살아있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인지, 혹은 육신의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그때야 인멸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생명을 견지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일생일대의 미션을 받고나온 인간은, 숨지는 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에 못지 않게 존재 전체의 소멸에 대한 끔찍함을 함께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 내 존재였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것. 내가 없어진 세상의 멀쩡함. 이 완전한 '부재'에 대한 무한한 억울함이 사멸의 공포에 뒤엉켜 있다. 이 사라짐에 대한 공포가, 영혼불멸과 영혼사멸의 지연의 신념을 불렀을 것이다.

태어나기도 어렵지만 죽어 사라지기도 어렵다. 탄생의 어려움은, 무(無)에서 유(有)로 편입되는 확률적인 어려움이지만, 죽음의 어려움은, 유(有)의 집착이 무(無)로 귀 잡혀 가는 일의 납득불가능에서 온다. 우리같이 생긴 생명체를 '사람'이라 부르고 '인간'이라 부른다. '사람'이란 말은 '살음'(살아있음)에서 온 것이니, 탄생하기 전과 죽음 이후를 뺀 나머지의 존재를 가리킨다.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사람이 아니고 죽은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고인(故人)이란 말은,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한때 사람이었던 존재라는 의미이다. 인간이란 말은 오묘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인간(人間)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한 사람을 가리킬 때도 쓰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사람이었던 그 사이'라는 뜻으로, 탄생과 죽음 사이를 말한다. 인간이란 태어난 존재이며, 아직 죽기전의 존재를 가리킨다.

태어나다는 말은 태(胎)에서 나온다는 뜻을 지닌다. 태생(胎生)을 푼 말이거나, 혹은 '태어나다'를 푼 것이 태생일 것이다. 이것은 그냥 '난 것'이 아니라, 10개월의 인큐베이터였던 '태'를 의식한 말이다. '나다'라는 것은 '나오다'라는 의미이다. 어딘가에 들어있다가 바깥으로 이동한 것이니, 출생의 의미가 담겨있다. 태어나다는 '태생과 출생'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다. 죽다라는 말은 '의미소'의 분석이 불가능하다. 왜 '죽'인지 알기 어렵다. 죽으면 '죽' 늘어지기 때문에 쓴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할 근거가 별로 없다. 워낙 치명적인 사건이니, 처음의 누군가가 당황 속에서 엉겁결에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망이 이토록 부드러운 발음으로 되어있다는 건, 불가사의하다. 태어나다는 말의 소릿값은 강하고 거창하지만, 죽음이란 발음은 단호하고 간결하여 허무하기까지 하다.
세상의 모든 욕은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에 몰려가 있다. 탄생에 대한 모욕과 저주는 주로 '개'와 관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개의 천성적인 난교와 근친상간을 빗대 욕하는 '씨'자 계열, '네미랄' '제미랄'의 욕이 다 그런 것이다. 죽음에 대한 모욕과 저주는 질병이나 형벌로 자주 나타난다. 지랄옘병이나, 쳐죽일, 난장할, 육시랄 계열이 그런 것이다. 잘 태어나지 못한 것, 잘 죽지 못한 것만큼 인간을 괴롭히고 슬프게 하는 것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삶은 한 일 자 한 글자를 쓰는 것과도 같다. 누에머리(蠶頭)처럼 거창하게 붓을 돌려 시작하는 일이 탄생이고, 말발굽(馬蹄)처럼 아름답게 닫는 것이 죽음이다. 그게 일생(一生)의 처음과 끝인데, 우린 그 중간에 주욱 그으며 밀고가는 그 선분의 한 지점에서 이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좌고우면 하더라도 한 줄의 뚝심으로 잘 나아가는 것이, 한 일 자 한 글자는 잘 만들 수 있는 비밀이리라.

영어로 태어나는 것은 BIRTH이고 죽는 것은 DEATH이니, 삶은 B와 D 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생각이다. 두 글자 모두 끝에 혀를 물고 있는 발음이니, 혀를 물고 태어났다가 혀를 물고 간다는 의미도 되지 않는가. 겨우 B와 D 사이를 옮기는데, 그럼 중간에 있는 C는 뭐란 말인가. CHOICE라고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모든 삶은 기로에 서있는 상황이라는 얘기이다. 사르트르가 생각나는 멋진 착안이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면 B는 두개의 D를 아래위로 겹쳐놓은 것이니, 태어나는 것은 드림(DREAM)과 두(DO)의 두 개의 D라고도 할 수 있다. 그걸 누군가가 '두드림'이라고 하니, 이거야 말로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으로 노크하는 형상이 아닌가. 그 두드림의 D 중에서 하나의 D를 버리는 게 죽음이다. 행위(DO)를 버리고 꿈(DREAM)만 남는 것이 죽음인 셈이다. 그러니 삶은 꿈에서 시작해서 꿈으로 끝나는, 호접지몽이며 한단지몽이며 일장춘몽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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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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