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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사소함에 목숨거는 까닭(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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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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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라는 기묘한 제목의
책이 나와 불티나게 팔렸다. 물론 내용에 대한
공감도 없지 않았겠지만 이 책을 펴낸 출판사를
짭짤하게 하는데 큰 몫을 한 것은 역시
그 제목값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농담처럼
하는 말에도 그런 비슷한 표현이 있었다.
어이,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어.

사소한 것에 집착하다가 진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핵심을 놓쳐버리기 쉽다는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모자라는
금언임에 틀림없다. 세상살이에서
중요함의 우선순위를 가리는 지혜는
세상을 허투루 살지 않으려는 신중함의
미덕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세상 살다보면
인간은 늘 일 같잖은 일에 얼굴 불그락푸르락 하고
말 같잖은 말에 시시비비를 따져 애초에
먹었던 곱고 바른 마음을 허공 속에 날려버리기
일쑤다. 그런 사정이니 그런 경계의 말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과연 무엇이
사소한 것인가. 그 판단이 정확한지를 누가
보증할 수 있는 것인가. 그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인간은 정말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것 아닐까?
내가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모든 사람이 사소하게 여긴다는 보장도 없다.
사소함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어이,사소한 데 목숨 걸지마."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본위의 핀잔이며 설득력 없는 주문일 수 있단 얘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중요한 일은 대부분
사소해보이기도 한다. 사소한 판단에서 큰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사소한 결단이 인생을 바꾼다.
사소한 양보가 인간을 매국노로 몰고가는 대흠집으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런 것 쯤이야...했던 것들이
결국은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본질을
뒤흔들 수 있다. 여기에 사소함의 중요한 정체가
있다.

신문사에 근무하다보면 사소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가 있다. 그때 속으로 내게 던지는
질문은 그것이다. 이 사소함은 과연 끝까지
사소한 일인가. 이 사소함은 단발적인 사소함인가.
뭔가 거대한 사건과 사태의 사소한 단서는 아닌가.
이 사소한 보도로 인해 사소하지 않을 상처를
입을 사람은 없는가. 이 사소한 양보가,
정말 우리 신문의 속곳까지 내리는 치명적인
굴종의 시작은 아닌가.
어찌 신문의 일 뿐만이겠는가.
생각없이 저지른 사소한 일들이 내 인생과
운명에 끼친 영향은 얼마나 컸던가.
사소한 생각들이 모여,신념을 이루고
사소한 경험들이 모여,한 인간의 삶을 이루는
현상을 늘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 인간을 해석하는 사소한 견해들이
결국은 그 인생을 말해주는 전기(傳記)이지
않겠는가. 세상은 뜻밖에 대부분 사소하다.
그 사소함의 사소하지 않은 얽힘이
역사와 관계와 삶을 만들어낸다.사소한
선택들의 축적이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다.
문제는 사소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

그때,호미로 막을 개미구멍일 때
지켜야했던 사소함이, 이젠 가래로도 못막는
운명의 질곡이 되었다.그래 모든 것은
사소함이다. 우린 사소함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지금 사소할 때 목숨을 걸지 않으면
나중엔 목숨을 걸어도 바꿀 수 없는
운명과 질곡이 된다. 사소함을 살피는 더듬이를
늘 열어두고, 다급하고 진지하게 묻고 따지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없는 삶의 태도이다.
사소한 곳에서 싸워라.

어떤 신부가 쓴 책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화를 낼 때 그 사람은 나의 어떤
한 가지 행동에만 화를 낸 것이 아닙니다.
오랫 동안 나의 행동에 내야할 화를 꾹꾹
참아오다 이번에 특별히 화를 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화를 냈을 때에는 그 동안의
내 행동을 모두 곰곰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사소한 일에 화를 내느냐고
억울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겐 사소하게 비치는 일이, 그 사람에게는
겹겹이 쌓인 사소함의 사소하지 않은 결과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야. 늘 웃으려무나. 밝게 지내렴.
아이들에겐 늘 친절하고 환하게 웃으렴.
내가 어린 시절, 너희 외할아버지는 늘 웃으셨어.
그래도 어린 딸은 아버지를 대하면 겁이 나더라.
그런데 매라도 댔다면 내가 얼마나 아버지를
멀리 하였겠어? 그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하신 말씀 하나가
언제나 내 가슴에 있어. 돌아가신 후에도.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해.
내 마음이 조금 더 수고스럽고 내 몸이 좀더 고달프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한단다. 난 그말을 늘 기억해왔지."

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해주신 충고는
얼핏 보면 사소하다.
어머니가 내게 해주신 충고도 사소하다.
그러나 그 사소함이란 삶을 요약하는
결정적인 함언이 아닐까?
아이들 앞에선 늘 웃어라.
혹은 네 몸이 좀더 수고스러우면
딴 사람들이 편하단다.
그런 당연한 말을? 그게 세상살이에
무슨 보탬이 된담? 그런 시큰둥한 생각으로
사소한 인생 조금씩 조지고 살다보면
오랜 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와, 그때 할아버지, 어머니 말씀이 옳았어.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사소한 충고에 다 들어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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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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