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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강선대에 꽃잎 하나 떨어지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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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7)


[千日野話]강선대에 꽃잎 하나 떨어지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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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년 2월 도수매가 피어나던 날, 이른 아침 두향은 강선대에 앉았다. 그 옆에는 퇴계가 써준 '혹애일매(惑愛一梅)' 묵적이 놓여 있었다. 옆에 이월이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월아, 단양기(丹陽妓)는 무엇이 자랑이냐?"

"네? 쇤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음. 조선 팔도에 기생이 있지만 지방마다 가무(歌舞)의 특색이 있느니라. 안동기생은 '대학지도(大學之道)를 음송하는 것이 능하고, 함흥기생은 출사표(出師表)를 읊는단다. 관동기생은 관동별곡을 노래하고 평양기생은 관산융마(關山戎馬)의 시를 창하고 영흥기생은 용비어천가를 외지. 그리고 북청기생은 말 달리는 춤을 춘단다."

"어머나, 그럼 우린 뭘 잘하지요?"

"내가 그걸 묻는 것이다. 나 두향이 생각하기로는, 단양기는 창도수매(唱倒垂梅)가 그 자랑이 아닐까 한다."

"아이구. 또 그 도수매 타령 하시려고요? 오지도 않는 사람, 기별도 않는 사람, 말없이 떠난 사람을 무어 볼 게 있다고 이렇듯 뒤통수 타령으로 일관한단 말인지요?"

"네, 이년.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 오늘 마침 늘어진 능수가지에 꽃이 피어 작년의 감흥이 돋는 듯하는구나. 내가 춤을 추며 창을 할테니 네가 거문고를 잡아보거라."

"아이고, 나는 잘 못하는데…."

"괜찮다. 시흥이 도도하면 가락은 그걸 따르는 것이니 그냥 네 마음 닿는 대로 뜯어보거라."

"네에, 아씨."

꽃 한송이가 고개 돌리고 있어도 그 미워함을 견디기 어려운데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매달리고 매달려 피었단 말인가
이리하여 내가 몸을 낮춰 꽃 밑에서 올려다보니
고개를 치켜든 꽃 머리 하나하나마다 마음 다가오는 게 보이도다

一花재背尙堪猜(일화재배상감시)
胡奈垂垂盡倒開(호내수수진도개)
賴是我從花下看(뇌시아종화하간)
昴頭一一見心來(묘두일일견심래)

퇴계와 두향의 합작시 '거꾸로 매달린 매화'

두향은 창을 하고 춤을 추면서 눈물을 흘렸다. 시를 함께 짓던 날의 황홀과 감격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몸을 낮춘 채 고개를 치켜든 두향의 머리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주던 그 체온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승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랑의 대부분을 그날 다 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줄 안다. 그가 그런 일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임을 안다. 2월 맵찬 바람이 뺨을 때린다. 냉혹하게 현실을 느끼라는 뜻인가.

"아씨, 춥사옵니다. 이제 들어가시와요."

"그래. 먼저 들어가거라.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테니…."

그녀는 거문고를 안았다. 오래 전부터 마음에 떠도는 시 한 편을 읊는다.

향(두향)의 바람이 산 위의 매화에 불어 들어오네
오늘같은 날의 꽃 약속 다시 돌아오지 않아 괴로워
달은 단양천 삼십 리에 환하게 떴는데
옥같은 사람은 어디 계시나 다시 오길 기다리는데

향풍취입령두매(香風吹入嶺頭梅)
방신여금고미회(芳信如今苦未回)
백월단천삼십리(白月丹川三十里)
옥인하처대중래(玉人何處待重來)

그리고는 강선대 바위 끝에 서서 퇴계가 써준 '혹애일매' 서지(書紙)로 얼굴을 감싸고는 단천(丹川)으로 뛰어내렸다. 소복이 팔랑거리며 나비같은 선녀 하나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바위에 얹어둔 도수매 매화 꽃잎 하나가 2월 바람에 문득 떨어져 두향이 간 길을 따라 다시 팔랑거리며 내려앉았다. 회오리같은 바람소리가 잠깐 일었을 뿐,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깐 뒤에 소스라치며 자지러지는 이월이의 비명소리가 이어졌을 뿐이다.

<계속>

▶빈섬의 스토리텔링 '千日野話' 전체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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