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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외면이란 말(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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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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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外面)은 아주 다른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면(內面)과 대비하여 쓰는 외면이 있고, 고개를 돌리는 외면이 있습니다. 앞의 외면은 겉모습이고 뒤의 외면은 어떤 행동인데 둘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겉과 속이 같을 때라면 굳이 외면이라는 말이 필요없을 겁니다. 외면은 겉으로 보기엔 이러이러했던 것이 속까지 보니 달리 보였을 때, 속과 다른 그 처음의 겉보기를 생각하는 말입니다. 낱말의 태생이 좀 불온하다 할까요. 외면은 부정(否定)되기 위해서 쓰이는 말입니다. 내면과 외면의 차이에 강조점이 찍힙니다. 그 친구 외면만 봐서는 안돼. 외면상 봐서는 그럴 듯 한데 속은 어떨지 몰라. 외면에는 의심과 불신과 차이가 숨어 있습니다.
외면하는 일은 더 심각합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면(面)이 있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할 때의 그 낯짝입니다. 낯짝에는 인간의 선하고 순한 바탕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얼굴에 붉은 빛으로 나타납니다. 얼굴에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으려면 살이 두꺼워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철판을 깐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얼굴에 철판을 까는 일은, 보통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대개는 철판을 깔아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얼굴을 돌려 버립니다. 그게 외면입니다. 물론 부끄러운 일만 그렇게 하는 건 아니고, 어렵고 성가시고 무섭고 힘겹고 슬프고 손해보는 일에 대개 그렇게 합니다.

외면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인간성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외면’이 들통날 위험이 있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외면하는 게 훨씬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길인데, 외면한 일이 밝혀지면 인격적 비난을 감수해야 할 때, 사람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릴 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떤 상황에도 한결같이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인격이겠지요. 저는 환경에 취약한 보통사람들을 가리키는 겁니다. 대개 외면하는 일은, 효용이 있습니다. 귀찮음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줍니다. 굳이 나서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일은, 어쩌면 생명체가 자기를 보존하는 지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도덕적으로 함부로 비난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처음에 겉낯의 외면과 고개 돌림의 외면이 같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했을 겁니다. 외면은 ‘최소한 낯짝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위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기대에 관한 뒤틀림입니다. 겉과 속이 같지 않음입니다. 겉낯은 한 거죽 덮어씀으로써 제 본성을 감추는 일이지만, 고개 돌림은 중요한 고비에서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어느 장애인 등반가가 설산(雪山)의 힘겨운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등정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 친구를 구호하는 일을 외면했습니다. 몸을 다친 그 친구는 얼어죽었고, 등반가는 자신의 욕망을 이뤘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이 밝혀져, 등반가의 비정(非情)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야하는 일은 늘 바쁘고, 길 가에 구호를 기다리는 손들은 많습니다. 저 등반가는 우리 자신입니다. 몇 번을 외면해야 서울 1호선 출근길을 통과하는지, 다시 생각합니다. 나의 외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식히며 죽어갔는지. 사는 일이란 죄짓는 일이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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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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