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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사야(史野)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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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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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바탕'은 중요할까? 이 질문은 좀 바보스러운가. 하지만 바탕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드러나는 것, 꾸미는 것에 들이는 돈과 수고에 비해, 바탕에 들이는 것은 얼마나 작은가. 스스로의 바탕에 들이는 것이 작으니, 남의 바탕 또한 크게 보일 리 없다. 바탕은 놔두고 허울을 갖추고 가꾸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허울은 무엇일까. 돈 그 자체는 허울에 가깝다. 얼굴도 허울이고 신체 외양도 허울이다. 옷도 허울이며 화장도 허울이다. 아버지의 재산도 허울이고 내 아파트도 허울이고 내 차도 허울이고 내 골프채도 허울이며 사교도 허울이다. 내 직업도 직급도 허울이며 연봉도 허울이며 마누라 얼굴도 허울이다. 학력도 허울이고 동창들의 면면도 허울이다. 말도 허울이며 글도 허울이며, TV도 허울이고 영화도 공연도 허울이다. 모든 비주얼은 허울의 다른 이름이다. 명성도 허울이고 명예도 허울이고 공명도 허울이고 명분도 허울이다. 허울을 보고 사랑하고 허울을 보고 결혼하고 허울을 보고 채용하고 허울을 보고 선거를 한다. 허울을 보고 평가하고 허울을 보고 비판하며 허울이 없으면 인정하지 않는다.
허울의 안쪽에 있는 바탕은 무엇일까. 그건 뜻밖에 간단하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바탕이다. 그 사람의 내면이 바탕이다. 생각하는 것, 마음 먹는 것, 분별하는 것, 선택하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근본적인 태도가 바탕이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것이 바탕이다. 존재의 정체성이 바탕이다. 태어나면서 타고나는 본성이 바탕이기도 하다. 그리고 살면서 꿈꾸고 지향하여 이뤄져가는 깨달음과 인격과 품격과 정성스러움과 예절과 신의와 덕성이 또한 바탕이다. 영성(靈性)도 바탕이다. 바탕은 안에 있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냥 봐서 견적내기 어려운 것, 미묘한 것이다. 바탕은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며, 가꾸기 어려운 것이며, 가꿔도 잘 가꿔지지 않는 것이며, 가꿔졌다 해도 반드시 세상살이에 유리한 것도 아닌 것이다.

허울은 잘 보이고 바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허울은 쉽고 바탕은 어렵다. 허울은 유통되기 쉽지만 바탕은 소통하기 어렵다. 모든 것에 값을 매기는 시장(市場)의 신도들은, 모든 허울을 한 줄로 세워 가치를 매기고 그 허울을 사람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안목을 유행시켜왔다. 허울과 마찬가지로 바탕까지도 가치의 크기로 견적내고 싶어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외형의 가치와 내면의 가치가 비례관계에 있지도 않고, 어떤 일정한 관계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자 대비 실적이 확실한 허울 쪽이 명쾌해보인다. 많은 악덕은 바탕의 효용이나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에서 나온다. 악당은 외형의 신화를 극대화한 신념의 소유자일지 모른다. 외형은 욕망의 애인이며 많은 악은 욕망의 다른 애인이다.

공자가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글쓰기에서였다. 바탕(質)이 허울(文)보다 앞서면 거칠어진다. (質勝文則野). 표현하고자 하는 뜻이 아무런 장식 없이 노출되면 글이 거칠어진다. 허울도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글을 쓰는 기교를 무조건 배격할 것이 아니라, 바탕을 잘 표현해내는 솜씨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 허울이 바탕을 앞서면 사(史)해진다.(文勝質則史). 사(史)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글쓰기를 꼬집은 말로 화사한 말로 잘 꾸며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번드르르해진다'에 해당할 것이다. 표현해야할 콘텐츠에 신경 쓰기 보다는 미문과 교문(巧文)에 빠지면, 말만 번드르르 하지 실속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허울 인플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조차도 허식과 꾸밈에 경탄하고 그것만이 진짜 글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공자는 문(文)과 질(質)이 둘 다 잘 갖춰져 함께 빛나는 것이(彬彬), 훌륭한 이라고 말했다. 문질빈빈의 생각은, 내용만을 중시하고 기교를 배격하는 것도 옳지 않고, 내용보다 기교에만 치중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는, 양쪽의 고른 가치를 천명한 것이다. 그는 기교는 내용이기도 하며, 내용은 기교이기도 하다(文猶質也 質猶文也)고 말하기도 한다. 내용과 기교를 넘나드는 경계에 대한 통찰이다.


허울은 나쁜 것인가. 그렇게 매도해버리면 공자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외형에도 본질이 있다. 그 본질적인 측면을 읽어내야 외형의 풍성한 의미를 붙잡아낼 수 있다. 허울만을 따르고 맹신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 또한 공자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허울을 중시하는 것은 그것이 본질을 감싸는 외형이기 때문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외형은 허물일 뿐이다. 뜻을 잃어버린 말은 그저 이미 말이 아니다. 거친 것(野)과 번드르르한 것(史) 사이의 균형과 절제. 글쓰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일은 형식과 내용의 길항적 관계를 품고 있다. 추사의 '사야(史野)'는 공자의 중립적 문체론에 바치는 영원한 오마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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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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