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철판 뚫는 화살의 비밀, 쇠심줄에 있다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창조경제 DNA 명인명품<7> 5대 잇는 家業 궁시장 유영기

피난때도 화살방 연 선친 밑에서
魂 . 기술 합쳐야 名弓 나온다 배워
대나무대 구하려다 간첩 오해도
1965년 들어온 양궁에 위기 맞고
옛 화살 복원.전문박물관 열어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활쏘기'는 옛 사람들이 즐긴 운동이자 수양이었다. 손님이 오면 차를 대접하기 전에 으레 '우리 활 한번 쏩시다'라고 청해 집 근처 활터로 향하곤 했다고 한다. 왕실에서도 궁술을 중시했는데, 정조가 명 궁수가 된 데도 이 같은 내력이 있다.평민들 사이에서도 활쏘기를 즐긴 이들이 적잖았으니, 활쏘기는 그만큼 조선시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가장 성행한 '사회체육'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전통 활과 화살은 예부터 질이 좋고 위력이 대단했다. 역사적 기록이 이것을 증명한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전투용으로 사용된 버드나무가지로 만든 화살 유엽전(柳葉箭)은 각궁에 걸어서 쏘면 명중률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편전(片箭) 또는 애기살이라고 불리는 화살이 발명돼 임란때 주요 병기로 활용됐다. 바로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는 화살이다. 편전은 절반으로 쪼개진 대나무통인 '통아' 안에 넣고 쏘는 짧은 화살을 뜻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활쏘기와 활은 옛 문화, 유물로 밀려나고 말았다. 몇년 전부터 활쏘기가 생활스포츠로 살아나는 듯하지만 서양의 카본 활ㆍ화살에 밀려 우리의 활과 화살의 처지는 옹색하다. 그나마 정부에서 전통 활쏘기 선수들을 양성하면서 소량의 주문 제작에 의해 전통 궁시(弓矢)가 만들어지고 있는 정도다.
"우리의 활과 화살의 역사는 생활이자 국운을 좌우하던 무기였어요. 그러나 많은 전통 공예품이 그렇듯 전통화살은 이제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게 돼버렸어요."

할아버지 때에 처음 시작해 이제 자신의 손자까지 5대째 전통화살을 이어가고 있는 유영기(77·사진) 궁시장의 말에는 우리의 궁술과 화살에 대한 진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1일 서울 삼성동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내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 있는 유 씨의 공방을 찾았을 때 그는 온통 화살들로 뒤덮인 공방에서 대나무 돗자리를 깔고 앉아 화살을 만들고 있었다. 세상이 변해 전통화살을 찾는 이들은 줄었지만 이를 지켜가고 있는 그의 자부심에는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단지 대나무에 쇠심줄을 감고 깃털만 꽂는다고 화살이 되는 게 아니다. 화살을 만들 때는 맥과 혼이 있어야 한다. 화살을 쏘는 사람을 일컫는 '한량(閑良)'마다 신체 치수와 걸음걸이, 체력이 모두 다른데 이를 고려해야 제대로 된 화살이 나오는 것이다." 수십년 동안의 훈련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궁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유 씨의 고향은 지금은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파주의 장단이다. 조선조 이래 활은 경북 예천, 화살은 장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아버지 유복삼 선생은 당대 최고의 화살 장인으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한 이였다. 유씨는 어릴적부터 아버지 어깨 너머로 화살 만드는 법을 보고 배웠다. 한국전쟁 후 가족이 모두 강화도로 피난을 떠난 후 장단이 더 이상 가기 힘든 곳이 돼버리자 선친은 장단과 가까운 금촌천에 자리를 잡았다. 피난길을 떠날 때 '목숨처럼' 챙겨온 장비들을 가지고 다시 화살방을 운영했다. 서울에서, 멀리는 삼척, 제주도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선친이 작고한 뒤 그는 파주에 그대로 남아 계속 화살을 만들었다. 그러나 1965년 국내에 양궁이 도입된 것은 그의 화살방에 큰 위기였다. 전통활을 쏘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원래 분업화돼 있던 공정도 그때부턴 혼자서 모든 걸 다 해야 했다. 화살촉까지 직접 만들어 써야 했다. 화살대를 만들 대나무를 구하러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유씨는 "충남 서산 같은 지역의 해풍을 맞는 대나무가 강하면서도 부드러워 좋은 화살을 만들 수 있다"면서 "대나무를 찾다가 간첩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70년간 화살과 함께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그건 결국 화살에 대한 그의 열정, 알면 알수록 깊이 빠져들게 되는 우리 활의 신비와 우수성 때문이었다.
 
유영기 궁시장이 복원한 화살들. 맨 아래가 편전 또는 애기살이라고 불리는 화살이다.

유영기 궁시장이 복원한 화살들. 맨 아래가 편전 또는 애기살이라고 불리는 화살이다.

원본보기 아이콘

그는 화살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가 '쇠심줄'이라고 했다. "모든 궁시의 힘은 쇠심줄에서 나온다." 쇠심줄은 소 등의 양쪽에 붙어있는 것으로, 밭을 갈 때나 마차를 끌 때 소가 힘을 쓰는 원천이다. 대나무 중에서도 화살대로 쓰이는 폭이 좁은 '시누대'를 깎아 양 끝에 실모양으로 푼 쇠심줄을 감고 어교(생선 부레로 만든 풀)로 붙이면 화살이 제아무리 빨라도 부러지지 않고, 철판까지 뚫는 강한 힘이 생긴다. 질긴 쇠심줄처럼 그는 결코 전통화살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인 세현씨와 손자도 그에게서 일을 배우고 있으니 화살 장인의 가업은 오랫동안 이어질 듯하다.

가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입으로만 전해 내려온 전통화살제작 기법을 책에 담아 내기도 했고 육군사관학교와 여러 박물관의 옛 서적들에 기록된 시대별 화살들도 그의 손에 의해 복원됐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으로 인정받은 데 이어 2001년 5월 파주에 자신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 활ㆍ화살 전문박물관 '영집 궁시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그의 외길 인생에 대한 작은 보상인 듯했다.

유씨는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박물관에서 '여기에 주몽이 있나요?'라고 천진난만하게 묻는 아이들을 만날 때 가장 기분이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오진희 기자 valere@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어른들 싸움에도 대박 터진 뉴진스…신곡 '버블검' 500만뷰 돌파 하이브-민희진 갈등에도…'컴백' 뉴진스 새 앨범 재킷 공개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국내이슈

  • 공습에 숨진 엄마 배에서 나온 기적의 아기…결국 숨졌다 때리고 던지고 휘두르고…난민 12명 뉴욕 한복판서 집단 난투극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해외이슈

  • 고개 숙인 황선홍의 작심발언 "지금의 시스템이면 격차 더 벌어질 것" [포토] '벌써 여름?'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PICK

  • 1억 넘는 日도요타와 함께 등장한 김정은…"대북 제재 우회" 지적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