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 시인의 나주, 왕건과 버들아씨의 로망스가 숨쉬는 곳<1·2>

나주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나는 곧잘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갔다가 돌아오곤 한다

국토여행은 언제 떠나도 즐겁다. 어디를 가도 고만고만한 산봉우리와 강줄기, 마을들의 풍경이 더할 나위 없이 정겹다. 하늘을 나는 새떼들과 강둑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꽃들은 모두 어릴 적 고향의 그것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반가울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곧잘 작은 배낭을 짊어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갔다가 돌아오곤 한다. 빈 가슴을 무엇으로 한껏 채운 듯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특히 역사가 숨 쉬는 곳이라면 즐겨 찾는다. 과거에서만이 아니라 오늘에 와서도 어떤 전망과 가르침을 주는 곳이라면 며칠간의 품을 내서라도 찾아간다. 이 땅의 어디인들 우리네 앞사람들의 삶과 체취가 놓이지 않는 곳이 없으련만 유난히 우리를 애타게 부르는 듯한 ‘역사의 고향’이 있다면 그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더러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조태일 시인의 ‘국토서시’ 한 대목을 불러들여,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하듯 읊조린다.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노래하면서 나의 국토여행도 이렇게 시작된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조태일 시인의 [국토서시]는 이 땅의 ‘통일’을 꿈꾸는 시편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시인은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가 ‘숨결을 보탤 일’을 궁극으로 삼는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시인은 동서남북 우리들의 사랑이 함께 모아지기를 꿈꾼다.



‘통일의 에너지’가 쉼 없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 같은 ‘나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하여 나 또한 조태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국토여행에 기꺼이 나선다. 정말이지, 시인들이라면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이 땅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 그래서 오늘 나는 역사의 저편에서 ‘통일의 에너지’가 쉼 없이 꿈틀거리고 있을 것 같은 ‘나주’로 발걸음을 옮긴다.


비록 중세의 통일관과 21세기의 통일관은 다르다손 치더라도, 나는 우러른다. 일찍이 우리 역사 속에서 창대한 통일국가를 세워 올린 고려태조 왕건! 천하를 울리는 그의 투지와 실루엣이 곳곳에 일렁거렸을 나주로 향하면서 영산강이 길게 휘돌아가는 금성산을 우러러 바라보는 것이다.


나주는 한반도의 곡창 중에 곡창

이화(배꽃)에 월백(하얀 달빛)이라! 봄날 나주를 찾으면 천지가 온통 하얀 배꽃이다. 여름이면 황도 복숭아, 가을이면 맛좋고 탐스러운 ‘나주배’로 유명세를 올리는 나주.
그러나 역시 나주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영산강과 금성산일 것 같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의 질서와 문화를 보여주었던 것이 아닌가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 ‘용소’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길이가 139km이다. 한강, 낙동강, 금강에 이어 남한의 4대강에 속하는 영산강은 담양의 대밭골을 적시다가 장성?광주?나주?함평?무안?영암을 거쳐 목포 앞바다 서해로 흘러간다. 강은 그러나 바다로 무심히 흘러가버리는 것은 아니다. 먼 옛날 청동기시대에는 유역에 지석묘군을 두었고 오랜 세월이 흐른 백제시대에 와서는 고분군을 둔다. 그리하여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문명의 질서와 문화를 보여주었던 것이 아닌가.


바로 그 강줄기가 휘돌아가는 곳에, 나주는 높이 451m의 금성산이 솟아있다. 나주의 진산이요 영산이라고 말하는 금성산은 네 개의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노적봉, 오도봉, 다복봉, 정녕봉이 그것들이다. 정녕 이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나주는 사방팔방이 툭 터진 호남쌀 생산의 중심지요 군량미의 공급처임을 자부한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호남을 가리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음이나 마찬가지다’ 라고 했음은 무슨 뜻인가.


이 경구는 임란의병의 70% 이상이 호남인이었음을 상기시켜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호남이 조선군대의 군량미를 대부분 충당해야 한데서 붙여준 경구였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3백50리 영산강의 중심에 놓인 나주야말로 ‘한반도의 곡창’이요 군사요충지로 말할 수 있겠다. 예로부터 명실공히 한반도의 ‘곡식창고’로서 그 구실과 역할을 다 해온 천년고도 목사골 나주. 바로 그 때문에 나주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영광과 상처를 동시에 받아온 내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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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후삼국시대부터 그러하다. 나주는 견훤과 왕건의 피어린 격전장이 되며 조선시대엔 사실상 가장 좋은 토지들이 조선왕조 궁실의 소유인 궁전(宮田) 혹은 사전(私田)으로 전락한다. 그러다가 결국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엔 나주평야 한복판에 조선총독부가 관장하는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이 들어서서 착취의 마수를 뻗친다. 하지만 민족은 죽지 않았다. 민족의 맥박은 이미 숨 가쁘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정책으로 그동안 쌓인 저항의 에너지가 분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불꽃이 나주에서부터 타오른 것이다. 역사의 당연한 발동이었으리라. 이 해 10월 29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충돌을 계기로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다. 마침내는 북만주 벌판의 학교에까지 그 불길을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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