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문화 선진국 일본도 보복운전 심각
피해자이자 가해자…스트레스 참지 못해 폭발
국내서도 형법으로 다뤄질 정도로 심각한 범죄
지난달 말 일본 나가사키 시내에서 촬영된 한 영상이 화제가 됐다. 빨간 색 차량이 앞에 있는 흰색 차량의 뒤를 바짝 쫓아가는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이 영상을 촬영한 사람은 "내가 직접 운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촬영자는 촬영 직후 경찰에 신고했다. 일본은 세계적인 교통문화 선진국이지만 보복운전은 여느 나라와 같다.
14일 일본 TV아사히는 "왜 '보복 운전'이 발생하는가?"라는 제목의 보도를 통해 일본에서도 보복운전이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바현 내의 한 국도에서는 갑작스러운 급브레이크, 진로 방해, 심지어 역주행까지 감행한 운전자가 있었다. 경찰은 49세 남성을 체포했지만 그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2017년 보복운전으로 일가족 4명이 사상한 비극적인 사고를 계기로 경찰의 단속이 강화됐고 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까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복 운전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규슈 지역에서는 주행 중인 고속버스 앞에 흰색 승용차가 끼어들며 급감속했고, 버스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기사는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신고 직후 승용차는 급정지하며 버스와 충돌했다. 승용차 운전자는 곧바로 버스에 달려들어 고함을 지르며 협박했다. 그는 체포됐다. 지난 1월 삿포로에서는 2만ℓ의 등유를 운반 중인 대형트럭이 보복운전으로 대형사고가 날 뻔 했다. 직선 도로에서 깜빡이를 켜고 좌측으로 붙은 경운기(소형 트럭)를 추월하더니 다시 진로를 가로막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갈길을 간 운전자도 있었다.
2024년 2000명 이상의 운전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70% 이상이 "보복 운전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전년도보다 약 20% 증가한 수치다. 10년 이상 보복운전을 연구해온 메이세이대학 심리학부 후지이 야스시 교수는 "피해자의 98%는 추월 차선에서 보복 운전을 당하고 있다"면서 "가해자의 80%는 자신이 가해자라는 자각이 없고, 60%는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인식한다"고 했다. 1000명 이상의 가해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대다수가"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다"라고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보복운전 가해자들은 "내가 먼저 위협당해서 보복한 것이다" "운전 습관을 바로잡아주기 위한 친절한 행동이었다" "상대가 운전을 싫어하게 되거나 포기하면 교통 질서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후지이 교수는 "보복 운전은 "하나의 순간적인 행동(점)이 아니라 쌓여 온 감정들이 연결돼 폭발하는 과정(선)"이라고 말했다. 특정한 순간의 분노가 아니라, 운전을 하면서 누적된 스트레스, 적의, 불만이 어느 순간 폭발하며 보복 운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이 막히다가 겨우 뚫렸는데, 앞차가 느리게 가면 "왜 지금 내 길을 막느냐"는 감정이 폭발하는 식이다. 특히 혼잡한 시내, 교차로, 합류 지점 등은 감정을 쌓기 쉬운 장소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보복 운전을 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스포츠카인데 너무 느리게 달렸다" "운전자의 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들었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해서 그것을 잊고 싶었다" 등이다.
후지이 교수는 보복운전 당했을 때 ▲상황인지 ▲정차▲녹화 등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하라고 주문한다. 상황인지는 뒤차가 바짝 붙거나 비정상적으로 따라오는 것을 빨리 인지해야 거리 확보 등의 대응을 할 수 있다. 보복운전이 있다면 일반 도로에서는 우선 길가에 정차하고, 가해 차량을 먼저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블랙박스를 활용하는게 중요하다. 스마트폰으로 직접 촬영하면 오히려 가해자를 자극할 수 있어 위험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음성만 기록하는 것도 유용하다.
국내서도 보복운전은 자동차 등을 이용해 사람에게 상해·폭행·협박·손괴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도로교통법이 적용되는 난폭운전과 달리 형법이 적용된다. 특히 보복운전은 단 1회의 행위라도 상해나 폭행, 협박, 손괴가 있었다면 적용되며, 의도를 갖고 특정인을 위협했다는 점에서 난폭운전과 차이가 있다. 보복운전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방향지시등(깜빡이) 미사용, 서행운전 시비, 운전자를 자극하는 끼어들기, 난폭운전, 경적ㆍ상향등 사용 시비 등이 있다. 대표 유형으로는 앞지르기 후 급감속 및 급제동, 급제동을 반복하며 위협하는 행위, 뒤쫓아가 고의로 충돌하는 행위 등이 있다.
형사처벌 대상인 보복운전은 특수상해의 경우 최소 1년 이상의 징역,특수협박·특수폭행·특수손괴의 경우 5년 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또한 구속여부에 따라 벌점 100점과 운전면허정지 100일 또는 면허 취소의 행정처분을 받게 된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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