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주 전 '10월26일' 때문에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었다. 무속인한테서 그날 현직 대통령이 서거할 것이라고 들었다는 괴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후보 시절 손바닥에 '왕(王)' 자를 적고 TV 토론회에 나섰던 일 때문인지, 장난 전화로 시작된 해프닝에 많은 이목이 쏠렸다. 공교롭게도 그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해서 그랬을 법도 싶다.
또 한 명. 10월26일에는 '보통 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도 타계했다. 올해 3주기를 맞는다.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은 잠시, 누구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역사는 여전히 막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을 계기로 노태우 일가가 숨겨뒀던 비자금이 화수분처럼 나오고 있어서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904억원'이라는 보통 사람은 쉽게 만져볼 수도 없는 현금을 꼼꼼히 적어둔 메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수십년간 잠자고 있던 이 메모는 딸인 노 관장의 이혼 소송 증거로 등장해 최 회장으로부터 1조3808억원의 재산을 분할받으라는 판결을 이끌어 냈다.
김 여사는 또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아들 노재헌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동아시아문화센터에 모두 147억원을 기부했다. 2023년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설립 당시에는 5억원을 출연했다. 얼마 전에는 차명으로 210억원에 달하는 보험에 가입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전업주부로 평생 경제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김 여사와 1000억원이 넘는 돈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림을 그리기엔 보통 사람의 상상력으로는 역부족하다. 누군가 답을 내놓아야 하는 이유다.
1300만명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울의 봄'으로 재조명된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노 전 대통령은 무려 4600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2682억원은 추징했으나, 나머지 금액은 자금 흐름을 찾지 못해 환수하는 데 실패했다.
노 관장은 아버지의 숨겨진 비자금 메모를 법정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비자금 추징 당시 자진신고 했다면, 조사가 이뤄져 국고에 귀속됐을 것이다. 당시 메모의 존재를 몰랐다고 해도, 재산 분할액을 높이고자 재판에서 공개한 만큼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이혼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노 관장에 성원과 지지를 보냈다. 혼인 생활이 파탄 나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자식을 간병하고, 본인은 암 투병까지 했다는 얘기에서 가정을 지키려고 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응원했다. 그도 "비록 잃어버린 시간과 가정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의 가치와 사회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앞으로 남은 삶을 통해 최선을 다해 이 일에 헌신하겠다"고 소회를 밝히기까지 했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멀지 않다.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와 아버지의 비자금 인정하고 환수 내지 사회 환원을 선언하는 것이 이혼 소송 최종 판결을 앞두고 더 떳떳한 태도다. 자신의 유불리를 따져 법정에서는 비자금을 공개하고, 국감 증언은 무시한다면 사회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오현길 산업IT부 차장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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