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화살도 사업도 '백발백중'…다음은 '자전거'가 타깃

언론사 홈 구독
언론사 홈 구독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박경래 윈엔윈 대표, 일어·영어 실력이 세계 시장 정복한 자산
양궁 국가대표·코치·감독에서 세계 1위 '경기용 활' 업체 리더로
파리올림픽 출전 128명 중 65명 위아위스 활 사용, 시장 55% 점유

"영어로 인터뷰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자산이 됐다."


양궁 국가대표에서, 명궁 조련사로, 세계 양궁 시장 점유율 1위 기업 대표로 성장해온 세계 양궁의 '최고수(最高手)' 박경래 윈앤윈 대표는 "때론 피곤하고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의 대외 인터뷰는 언제나 내가 나서야 했다"면서 "영어를 할 수 있었기에 기회도 얻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안성시 소재 윈엔윈 공장에서 '위아위스' 활의 부품에 대해 설명하는 박경래 대표. [사진=김종화 기자]

경기도 안성시 소재 윈엔윈 공장에서 '위아위스' 활의 부품에 대해 설명하는 박경래 대표. [사진=김종화 기자]

AD
원본보기 아이콘

박 대표는 1975년부터 1978년까지 4년간 양궁 국가대표를, 1984년부터 1991년까지 8년간 양궁 국가대표 코치와 감독을 지냈다. 당시 영어를 하는 코치진이 드물어 영어를 할 줄 아는 자신이 늘 인터뷰를 해야 했는데, 그때 쌓은 경험과 인맥이 윈엔윈이 세계 1위 경기용 활(리커브) 제조·판매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큰 자산이 됐다고 했다.

'신궁(神弓)'으로 불렸던 그의 손을 떠난 화살은 그가 선수로서 이름을 날리게 하진 못했지만, 그를 국가대표 지도자로 세계라는 넓은 물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고, 그의 외국어 실력은 세계시장을 꿰뚫은 무기가 된 것이다.


고1 때 클럽활동서 처음 잡은 활…깨어난 '신궁(神弓)'

1972년 부산 경남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마도로스(외항선원)를 꿈꾸던 소년 박경래는 동아고등학교에 입학해 교내 클럽활동에서 양궁을 처음 접했지만, 곧 두각을 나타냈다. 고3 때인 1974년 양궁 종합선수권대회에서 6개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는 등 전국대회를 휩쓸며 '신궁(神弓)' 소리를 듣게 된다.


1975년 열아홉 살의 박경래는 동아대학교 체육과에 장학생으로 입학, 양궁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의 최고기록은 1221점이었는데, 당시 세계기록은 미국의 리처드 매키니 선수가 쏜 1229점이었다. 남자 선수는 90m·70m·50m·30m에서 거리별로 36발씩을 쏴 그 점수의 합계로 집계하던 시절이었다. 1440점이 만점이었고, 모든 선수가 1200점을 넘기기 위해 땀 흘리던 시절이었다.

1975년 국가대표 결성 이후 첫 태릉선수촌 입촌 당시 포즈를 취한 남녀 선수들. 뒷줄 맨 오른쪽이 이기식 선수(국가대표 감독 및 호주와 미국 대표팀 감독 역임), 그 옆이 박경래 선수(당시 대학교 1학년으로 스무 살 때), 박 선수 옆 뒷줄 가운데는 석동은 선수(영국 양궁대표팀 감독 역임). [사진=박경래 소장]

1975년 국가대표 결성 이후 첫 태릉선수촌 입촌 당시 포즈를 취한 남녀 선수들. 뒷줄 맨 오른쪽이 이기식 선수(국가대표 감독 및 호주와 미국 대표팀 감독 역임), 그 옆이 박경래 선수(당시 대학교 1학년으로 스무 살 때), 박 선수 옆 뒷줄 가운데는 석동은 선수(영국 양궁대표팀 감독 역임). [사진=박경래 소장]

원본보기 아이콘

그와 세계 1위의 차이는 8점에 불과했지만, 그는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국가는 그의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고, 메달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국제대회에 출전시키지 않았다. 박 대표는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됐다"면서 "그때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지도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고 고백했다.

그때가 대학교 2학년으로 스무 살이었다. 양궁 지도자가 되기 위해 공부할 수 있는 교보재가 당시로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돌파구로 찾은 것은 일본의 양궁 잡지 '아처리(Archery)'였다. 이 잡지에는 양궁에 대한 모든 정보가 들어있었다. 이 월간지를 독파할 수 있다면 지도자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지식은 물론, 세계 양궁계의 정보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도자 되자 결심, 1년 만에 일어 독파·영어도 일취월장

일본어를 공부한 지 1년 만에 일본어로 된 잡지를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양궁 용어가 영어로 돼 있어서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어도 같이 공부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영어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됐다. 일본어만 죽어라 공부한 탓에 다른 과목은 모두 'F'를 받았지만, 일어와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는 만족했다.


1979년 스물셋에 군에 입대하면서 선수 생활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 선수가 여자개인전에서, 대한민국이 여자단체전에서 우승하면서 "왜 남자 선수는 국제대회에 출전시키지 않느냐"는 비판 여론이 제기됐고, 이듬해부터 남자 선수도 국제대회에 출전하게 된다. 군대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인생은 원래 그런 것 아니겠냐"며 씁쓰레함을 달랬다고 했다.

1991년 8월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제36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후 코치진과 선수단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에서부터 이은경 선수, 이왕우 여자코치, 이선희 선수, 김수녕 선수, 박경래 총감독(당시 35세), 양창훈 선수, 전인수 선수, 윤종찬(남자코치), 정재헌 선수. 당시 한국 선수단은 남녀단체전과 여자개인전(김수녕)에서 우승했다. [사진=박경래 소장]

1991년 8월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열린 제36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후 코치진과 선수단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에서부터 이은경 선수, 이왕우 여자코치, 이선희 선수, 김수녕 선수, 박경래 총감독(당시 35세), 양창훈 선수, 전인수 선수, 윤종찬(남자코치), 정재헌 선수. 당시 한국 선수단은 남녀단체전과 여자개인전(김수녕)에서 우승했다. [사진=박경래 소장]

원본보기 아이콘

제대 후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땄고, 1984년부터 남자 국가대표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90년 남녀대표팀 초대 총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1985년 세계양궁선수권,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1991년 세계양궁선수권 등에서 금메달을 석권하며 한국 양궁을 세계 최강에 올린 주인공이다. 1990년 미국 애리조나주립대학 강연 등 2004년까지 15년 동안 전 세계로 강연을 다니며, 명강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1991년 후배인 이기식 총감독에게 자리를 물려줬을 때가 서른다섯 살로 너무 젊었다. 오라는 곳은 많았지만, 가슴 속 식지 않는 열정을 불태울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우리 선수들이 모두 일제 야마하 아니면, 미제 호이트 활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활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윈엔윈 창립 3년 만에 고배

박 대표는 "그때 국산 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나이키나 테일러메이드 등 대부분의 스포츠용품사는 창립자가 스포츠인 출신이다. 나도 활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다"고 윈엔윈 창립 배경을 밝혔다. 2년 뒤인 1993년 10월 곽윤식·지달수·이철·윤일석·박미경 등 다섯 명의 후배들과 의기투합해 경기도 김포에 공장을 임대해 '윈엔윈(WIN & WIN)'을 창립했다. 목동의 집을 팔고, 대출을 받아 4억5000만원을 마련해 자금으로 썼다.


미국에서 카본을, 캐나다에서 나무를, 일본에서 접착제와 페인트를 어렵사리 구해와 1년 6개월 만에 첫 제품을 만들었다. '박경래가 만든 활'이라는 신뢰에 힘입어 제품은 잘 팔렸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제품에서 문제가 발견됐다. 활의 표면에 금이 간 것이다. 모든 제품에서 문제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경기에 지장을 줄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전 제품을 리콜했다. 자금이 바닥이 났고, 결국 회사는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임시현이 과녁을 조준하고 있다. 임시현의 활 역시 윈엔윈의 '위아위스'다. [사진=연합뉴스]

2024 파리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임시현이 과녁을 조준하고 있다. 임시현의 활 역시 윈엔윈의 '위아위스'다. [사진=연합뉴스]

원본보기 아이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오기였다. 그리고 후배들의 응원이었다. 회사에 남은 후배들이 "끝까지 해보자"고 했다. 남은 집을 담보로 2억원을 대출을 받아 경기도 용인에 다시 공장을 세우며 1년 만에 재기했다. 카본을 일본 도레이와 미쓰비시 제품으로 바꿔 두 번째 활을 만들었다.


당시 활 시장은 미국의 호이트가 50%, 일본의 야마하가 30%, 유럽의 몇몇 브랜드가 20%를 점유하고 있었다. 윈엔윈이 두 번째 활을 내놓자마자 호이트와 야마하의 제품에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다. 호이트는 시위를 당기면 활이 부러졌고, 야마하는 시위를 놓으면 활이 심하게 떨려 화살이 활을 떠나기도 전에 흔들리게 된 것이다.


야마하의 퇴진, 日 시장 흡수하며 세계시장 진격

윈엔윈의 두 번째 활은 일본 시장을 집중 공략했다. 야마하 대신 윈엔윈의 활을 들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한 일본 선수가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일본에서 주문이 폭주했다. 윈엔윈이 일본 시장을 잠식하자 2002년 야마하는 활 생산을 중단, 골프용품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한다.


윈엔윈은 야마하의 기계설비를 구입하고, 일본 국가대표 출신을 영입하는 등 일본 시장에 공을 들였다. 박 대표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일본 대표선수 100%가 우리 활을 사용한다"면서 "야마하의 기계를 사들인 것이 일본인들에게 야마하의 기술을 이어받은 회사라는 인식을 심어줘 수월하게 시장을 흡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유럽 시장 진출 때는 인맥 덕을 봤다.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 당했다. 1998년 미국 사냥용 활(컴파운드) 제조사인 PSE와 주문자위탁생산(OEM) 계약을 맺었다. PSE도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가던 중 박 대표의 이전 미국 강연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골드 부사장이 박 대표를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하면서 극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1998년 미국 PSE와 주문자위탁생산(OEM) 계약을 맺을 당시 PSE의 조건은 앞으로 생산할 활에 영문으로 'Park, Kyung-Rae'를 새기는 것이었다. [사진=김종화 기자]

1998년 미국 PSE와 주문자위탁생산(OEM) 계약을 맺을 당시 PSE의 조건은 앞으로 생산할 활에 영문으로 'Park, Kyung-Rae'를 새기는 것이었다. [사진=김종화 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박 대표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으나 강연에서 감동을 받았던 그는 박 대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경기용 활(리커브) 시장에 진출하려던 PSE는 활에 영문으로 'Park, Kyung-Rae'를 새기는 조건으로 윈엔윈에 OEM을 허락했다.


1997년 유럽 시장 진출 때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 네덜란드 양궁 대표선수로 출전했던 요한 반 드르눈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외면당하고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네덜란드의 제이빌사를 방문했을 때 2세 경영인으로 경영수업을 받던 요한 반 드르눈이 박 대표를 알아보고, 연간 100여대의 활을 주문한 것이다. 그러다가 1999년 7월 400여명이 출전한 프랑스 리옹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윈엔윈의 활을 든 단 2명인 이은경, 홍성칠 선수가 남녀 개인전 금메달을 따면서 유럽에서도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014년 자전거 시장 진출, TIPA 지원 R&D 자금 도움 돼

위기도 있었다. 2004년 그리스올림픽을 앞두고 새 활이 부러지는 문제가 생겨 시합 전에 리콜을 해야 했고, 2007년에는 환율이 800원대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수출하면서도 손해를 봐야 했다. 2004년 중국에 진출했다가 기술을 베끼고, 기술자들을 빼가면서 어려움도 겪었다.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TIPA)으로부터 연구·개발(R&D) 자금도 지원받았다. 2015년 6억원, 2021년 4억원을 지원받아 '고인성 알루미늄 합금 양궁 핸들' 등을 개발했다. 박 대표는 "지원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윈엔윈의 '위아위스(WIAWIS)' 자전거를 타고 경기 중인 선수들. [사진=윈엔윈]

윈엔윈의 '위아위스(WIAWIS)' 자전거를 타고 경기 중인 선수들. [사진=윈엔윈]

원본보기 아이콘

지난 8월 막을 내린 파리올림픽에 출전한 양궁선수 128명 중 65명이 윈엔윈의 '위아위스(WIAWIS)'를 사용했다. 9월 현재 세계 경기용 활 시장 점유율은 55:35로 위아위스가 호이트를 20%가량 앞섰다. 지난 도쿄올림픽 때는 호이트가 50%를 차지했고, 위아위스가 35%로 밀렸다.


2014년 윈엔윈은 '위아위스 카본 자전거'를 출시하며 자전거 시장에 뛰어들었다. 박 대표는 "호이트와 윈엔윈이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는 구도지만, 호이트는 주력이 사냥용 활이라 윈엔윈보다 매출 규모가 더 크다"면서 "앞으로 윈엔윈의 매출은 자전거의 비중이 더 커질 것이다. 2019년에 가동하기 시작한 미얀마 공장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매출은 250억원이다. 중국에 중저가 시장을 빼앗기면서 양궁 매출이 약간 줄었으나, 자전거에서 줄어든 만큼의 매출이 올라오고 있다.


그는 2012년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 대통령 표창, 1988년 체육훈장 맹호장, 1986년 대통령 표창과 체육훈장 백마장을 받은 국가적 영웅이다. '93년 윈엔윈 창립멤버로 현재까지 함께하고 있는 든든한 후배 이철(공장장)과 박미경(국내영업 담당), 그리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제2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따온 아들 박동원 전무가 그의 뒤를 받치고 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언론사 홈 구독
언론사 홈 구독
top버튼

한 눈에 보는 오늘의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