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人]꿈·현실 경계서 만든 '미나리'는 할머니의 축복
'미나리' 정이삭 감독, 아버지 감정 이해하려 아버지가 된 후 각본 써
오스카 6개 부문 후보 "'미나리'가 통합 가져다주길 희망해"
리 아이작 정(정이삭·43) 감독에게 미나리는 사랑이다. 유년기에 할머니가 키운 한국 채소 가운데 가장 잘 자라서다. 농장 화재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던 가족에게 희망이 돼줬다. 그는 할머니의 사랑이 깃든 덕이라고 생각했다.
어렴풋한 초록빛 기억은 영화 ‘미나리’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데이비드(앨런 김)와 외할머니 순자(윤여정)가 잘 자란 미나리를 보며 흥겨워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데이빗아. 너는 미국서 나서 미나리 먹어본 적 없지? 미나리가 얼마나 좋은 건데. 미나리는 이렇게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미나리~ 미나리~ 미나리~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 "그래,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
정 감독은 "일곱 살 딸 리비아에게 들려주고 싶어 만든 가족 이야기"라고 말했다. "어떤 외국어보다 깊은 진심의 언어를 그렸다. 많은 사람이 이 사랑의 언어로 말하는 법을 배웠으면 한다."
그는 각본에서 보편성을 중시한다. 신호등도 없는 미국 아칸소주 깡촌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생긴 관념이다. 정 감독은 재미교포 2세다. 마을에서 유일한 한국계라 미국인으로 자각할 수 없었단다. 막상 한국에 가면 모르는 것이 많아 한국인으로 느끼지도 못했다고. 국외자에 가까운 삶의 정체성. 이에 대한 물음이 그를 영화감독으로 이끌었다.
정 감독은 ‘문유랑가보(2007)’로 처음 두각을 나타냈다. ‘문유랑가보’는 르완다 부족 간 학살로 고통받는 소년들의 이야기다. 고아인 문유랑가보는 친구 상그와와 여행을 떠난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다. 상그와가 오랫동안 헤어진 부모와 지내기 위해 고향 집에 머물자 홀로 복수의 길을 재촉한다.
정 감독은 현지 아마추어 배우들을 섭외해 열하루 만에 촬영을 마쳤다. 제작비는 고작 3만달러. 국제예수전도단(YWAM) 소속으로 르완다에서 예술치료를 하던 아내 발레리 추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문유랑가보’는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고, 미국영화연구소(AFI) 영화제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투치족과 후투족의 대립을 극적으로 재현하기보다 그들의 미래를 지켜봐달라고 나지막이 속삭인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2007년 국내 한 영화 전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학살을 재창조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수많은 르완다인이 할리우드가 만든 르완다 학살 관련 영화를 보고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르완다인들이 트라우마를 벗어던지도록 도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특히 르완다에서 만난 고아들이 ‘내 부모를 죽인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왜 내가 그들에게 복수하면 안 되는지 이유를 말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성을 담은 작품들이 모두 성공한 건 아니다. 정 감독은 ‘럭키 라이프(2010)’, ‘아비가일(2012)’ 등의 흥행 실패로 한때 메가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가장으로서 책임도 느껴 유타대학 아시아캠퍼스에서 영화영상학과 교수로 일했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써 내려간 각본이 바로 ‘미나리’다. 미국 작가 W. S. 캐더의 대표작 ‘나의 안토니아’에서 영감을 얻어 자전적 경험에 진실되게 다가갔다.
정 감독은 ‘미나리’를 좀 더 일찍 쓸 수 있었으나 서두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겪었을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왜 농장을 일구려 했는지, 왜 꿈을 좇았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아버지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그러려면 나이도 들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돼야 했다. 그는 "극 중 제이콥(스티븐 연)이 아버지일 수 있지만 제 모습도 투영돼 있다”며 “아버지로서 겪은 감정들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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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는 지난 15일(한국시간)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지명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까지 포함해 여섯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정 감독은 수상 여부보다 ‘미나리’가 널리 회자되는 상황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한다. "‘미나리’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아시아계가 아닌 사람도 이 영화를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미나리’가 통합을 가져다주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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