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1991년 8월14일로 돌려보자. 필자는 여성담당 기자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취재 중이었다. 이 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이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1924~1997)였다.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6살에 베이징에서 일본군에 끌려가 일본군이 운영하던 수용시설에서 온갖 능욕을 당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애써 참던 눈물을 쏟아냈다. 빨간 벽돌집에서 조선 여성 5명이 '위안부' 생활을 했고, 어떤 날에는 하루에도 7~8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당시 윤정옥 공동대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고령에 병을 몸에 달고 사는 분이 많다. 대부분 가족이 없다"고 했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되짚고, 공개석상에서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 있는 행동 이후 국내외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1992년 1월8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 방한을 앞두고 일본 정부의 위안부 전쟁범죄 책임 인정과 공식 사죄,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수요 집회가 시작됐다.
세월이 흘렀다.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피해자 할머니 240명 가운데 222분이 일본 정부의 사과 한 마디 못 듣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수요 집회는 한 번도 거르지 않았고 위안부 문제가 국제 여론으로 확대되어 미 하원이 일본 총리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2007년 7월)'을 채택하는 성과도 있었다. 정대협은 2015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로 명칭을 바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후원금을 내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꽃다운 나이에 끌려가 끔찍한 고초를 당했던 할머니들을 위해 일하는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것은 누가 봐도 의미 있는 일이었으니까. 또 한 가지. '윤미향 간사'는 정대협 대표, 정의연 이사장을 거쳐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가 됐다.
정대협과 정의연의 불투명한 회계처리 논란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지난 7일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92)의 폭탄발언이 몰고 온 거센 후폭풍이다. 할머니는 "속을 만큼 속았고 당할 만큼 당했다. 정의연이 후원금을 어디에 쓰는지 모른다.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후원금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후 하나둘씩 드러나는 문제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국고보조금 13억원을 받아놓고 국세청 공시자료에는 5억3000만원이라고 적었다. 국가에서 단 몇 푼이라도 받아본 단체들이라면 이런 '작은 실수'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내세워 지난 4년간 모금한 후원금 49억2000만원 중 피해자 지원에 사용한 돈은 9억2000만원에 불과하다. 윤 당선자가 개인계좌들로 기부금을 모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윤 당선자는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 위반, 업무상횡령ㆍ배임, 사기 등 혐의로 고발당한 상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정대협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평생 분함과 화를 어찌 할지 모르고 죄인처럼 지내온 할머니들의 사무치는 아픔을 세상에 공개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여론화시켰다고 해서 회계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 기부금이 목적대로 쓰였는지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은 기부금을 받는 단체가 지켜야 할 의무다. 사익을 챙겼다면 그건 위선을 넘어 용서받을 수 없는 너무나 추악한 범죄다. 역사의 희생물이 된 불쌍한 할머니들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기하며 자문해 본다. 그들에게 '순수의 시대'는 있었을까? 본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말대로 '고쳐 쓸 수도 없고, 해체하는 게 맞다'면 그에 앞서 기금의 용처를 낱낱이 밝히는 게 순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방역 선진국으로 세계 각국의 부러움을 샀던 부분은 투명성에 있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투명성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 사태가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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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혜리 언론인/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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