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혁신(革新)은 고통스럽다.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등을 완전히 바꾸어 새롭게 한다는 사전적 의미와 함께 말 그대로 '가죽을 벗겨내 새로 만든다'는 뜻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대응되는 'innovation'이란 영어 단어의 어원을 살펴봐도 라틴어 'innovates'에서 파생했으며 innovates는 in(into)와 novus(new)를 조합한 단어다. 근본부터 새롭게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 만큼 원하던 결과를 얻을 가능성도 매우 낮다.
여러 분야에서 혁신을 이야기한다. 주술 또는 주문처럼. 정부의 정책, 기업의 사업계획에 혁신이라는 단어가 빠지면 하자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섬뜩한 어원을 담은 동사지만 혁신성장, 혁신경제, 혁신기업, 혁신제품, 혁신인재, 혁신리더십, 혁신아이디어 등 어디든 붙는다.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새롭게 해야 할 대상이 그렇게도 많은가 보다.
블룸버그는 세계 혁신지수까지 개발해 매년 국가별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여러 분야에서 주문처럼 혁신을 외쳐온 덕에 올해까지 4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연구개발(R&D) 분야 지출액, 제조업 창출 부가가치, 생산성, 첨단기술 분야 기업 수, 고등교육기관 진학자 수, 전문연구원 수, 특허등록 활동 등 7개 분야를 정량화해 합산한 결과다.
그러나 불편한 진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혁신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정해져 있고 그 과실 역시 소수가 독점한다는 점이다. 오너, 최고경영자, 고위관료, 정부부처, 감독기관 등이 그 주체이며 혁신의 대상은 그들을 뺀 나머지다. 혁신이라는 범주에 수신(修身)은 빠진 지 오래다. ‘혁신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혁신적 인재가 돼야한다’ 등 2인칭, 3인칭 동사로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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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이 빠지니 아이러니가 생긴다. 매년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근로자들을 무두질 했던 잘 알려진 대기업의 오너는 수십억원대 회삿돈을 빼돌려 자신의 집 공사비로 쓴 혐의로,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며 주목받는 기업으로 성장한 건설사의 오너는 조세포탈 혐의로 수사를 앞두고 있다. 금융기관을 상시 감독하고 제재하는 금융감독원은 채용비리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고,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국가정보원은 수십억원의 돈을 살포하면서 ‘댓글공작’을 주도했다.
11월이다. 다시 혁신을 고민하고 말해야하는 시기가 왔다.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했다. 이번엔 습관처럼 '무엇을 혁신할지' 말하기 전에 '어떤 혁신이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건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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