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 詩] 저녁이 올 때/문태준
옛 석굴의 내부 같아요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
나는 풀벌레 무리 속에
나는 모래알, 잎새
나는 이제 구름, 애가(哀歌), 빗방울
산 그림자가 물가의 물처럼 움직여요
나무의 한 가지 한 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어요
새들은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 가며 날아 앉아요
새들이 날아가도록 허공은 왼쪽을 크게 비워 놓았어요
모두가
흐르는 물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쪽 하늘로 가는 돛배처럼
■기막힌 시다. 단 한마디도 함부로 얹을 수 없는 시다. 나는 다만 이런 부탁들만 하려고 한다. 이 시의 마지막 행에 적힌 "서쪽 하늘"을 관습적인 의미망으로 가두지 않길 부탁한다. 그것은 그저 차라리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서쪽 하늘"일 때 비로소 시적이다. "새들이 날아가도록" "왼쪽을 크게 비워 놓"은 허공을 떠올려 보라. 얼마나 아득하고 풍요로운가. 그리고 "나는 희미해져요" "나는 사라져요"를 자기 '소멸'을 통한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상투적인 맥락 속으로 구겨 넣지 않길 부탁한다. 그런 의미화는 시를 빈곤하게 만든다. 이 시에서 '나'는 오히려, "옛 석굴의 내부 같"은 '저녁' 속에서 "풀벌레 무리"와 "모래알, 잎새"와 "구름, 애가(哀歌), 빗방울" 그리고 "산 그림자"와 교호하고 그래서 "나뭇가지를 서로 바꿔 가며 날아 앉"는 새와 마침내 전혀 다르지 않은 "모두"의 일부가 된 자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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