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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24] 달력에 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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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직장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달력이 나왔거든 몇 부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이런 답을 기다렸습니다. '예, 나왔어요. 곧 보낼게요.'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올해는 달력을 찍지 않았습니다. 경기도 어려운데다, 수요(需要)도 별로 없어서 그러기로 했어요."

 서운했습니다. 서운함을 넘어 난감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삼십년 이상 그것만을 달력으로 알고 살아온 까닭입니다. 심심하리만치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여백이 많고 앞뒤 달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지요. 넉넉히 얻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무엇을 걸어야 하나?' 다른 달력을 걸면, 마치 모르는 사람의 사진처럼 낯선 느낌일 것만 같습니다. 중독이 따로 없습니다. 너무 오래 한 가지에만 정을 붙인 탓입니다. 그나저나 맘에 드는 달력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연말이 코앞인데.
 생각건대, 달력은 세밑 풍경에 빼놓을 수 없는 '소품(小品)'이었습니다. 현실이 춥고 고단할수록, 새해에 거는 기대는 커지기 마련이었지요. 나아지지 않는 세월을 탓하며 쓸쓸히 술잔이나 부딪히고 헤어지는 친구의 손에 쥐어주던 그것. '돌돌 말은 달력'은 희미한 희망의 온기(溫氣)를 지닌 물건이었습니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
 어졌다/…(중략)…/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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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우리 이웃들의 송년모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소중하게 옆에 끼'고 갈 달력은 많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달력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제 후배 애기가 옳지요. '…수요가 많지 않아서…'
 달력을 대신하는 것들이 많아진 까닭입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들과 핸드폰…. 그것들이 스케줄을 기억하고, 약속시간까지 일러줍니다. 내후년에는 공휴일이 몇 번 있는지도 가르쳐줍니다. 젊은이들은 십년 뒤의 자기 생일이 무슨 요일인지도 즉석에서 알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달력이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절의 달력은 날짜를 알리는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퍽 오랫동안 우리가 꿈꾸고 노력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안엔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 먼 나라의 집들과 동화 속 삽화(揷畵)같은 풍광(風光)이 있었습니다. 그림 같은 길과 자동차가 있었고, 천사 같은 아이들의 웃음과 눈부신 미인들의 미소가 있었습니다.
 지질(紙質)은 또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것은 가정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고급스런 종이였습니다. 눈처럼 새하얀 그것으로 하는 일은 왠지 신성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것이기에 새 책의 표지를 싸는 것처럼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때에나 쓰였습니다.

 새 달력을 마주하는 제 마음은 여전히, 공책을 새로 장만한 어린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스토리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면서 마음의 행로(行路)를 다잡게 됩니다. '올해는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지'. 그런데 이 생각 끝에 왜, 갑자기 제 어린 시절 바람벽에 붙어있던 그 달력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국회의원의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달력이었습니다. 열두 달이 한 장 안에 다 들어있었지요. 일 년 내내 한 사람 얼굴만 쳐다봐야 하는 단점은 있었지만, 궁핍한 시절 그 달력 한 장은 참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제작 의도가 그리 순수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것에 관한 오늘의 제 기억은 퍽 긍정적입니다.

 정치가가 자신이 짊어지려는 세월과 자신의 얼굴을 일대일(一對一)로 나란히 놓는다는 것은 역사 앞에 명예를 걸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 태도의 주인공이라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간판에 넣은 설렁탕집 할머니처럼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국가와 국민의 시간'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自覺)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 땅에서 지도자가 되고 싶고 '리더'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그런 달력을 '만들어 갖기'를 권하고 싶어집니다. 많이 찍을 필요도 없습니다. 열 장쯤만 인쇄해서, 집과 사무실 방마다 붙여두었으면 합니다. 정치가의 얼굴은 곧 '시간의 얼굴'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문짝만하면 좋겠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보고 또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정치가들이 많아지면 대한민국은 달력이 필요 없는 나라가 될지도 모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인데 달력 볼 일이 뭐 있겠습니까. 산중무력일(山中無曆日). 산속에 달력이 있을 이유가 없듯이.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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