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했습니다. 서운함을 넘어 난감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삼십년 이상 그것만을 달력으로 알고 살아온 까닭입니다. 심심하리만치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여백이 많고 앞뒤 달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지요. 넉넉히 얻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던 물건이었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 무엇을 걸어야 하나?' 다른 달력을 걸면, 마치 모르는 사람의 사진처럼 낯선 느낌일 것만 같습니다. 중독이 따로 없습니다. 너무 오래 한 가지에만 정을 붙인 탓입니다. 그나저나 맘에 드는 달력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연말이 코앞인데.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
어졌다/…(중략)…/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중에서
올해 우리 이웃들의 송년모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소중하게 옆에 끼'고 갈 달력은 많지 않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달력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제 후배 애기가 옳지요. '…수요가 많지 않아서…'
달력을 대신하는 것들이 많아진 까닭입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전자기기들과 핸드폰…. 그것들이 스케줄을 기억하고, 약속시간까지 일러줍니다. 내후년에는 공휴일이 몇 번 있는지도 가르쳐줍니다. 젊은이들은 십년 뒤의 자기 생일이 무슨 요일인지도 즉석에서 알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달력이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습니다. 지난 시절의 달력은 날짜를 알리는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퍽 오랫동안 우리가 꿈꾸고 노력해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안엔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 먼 나라의 집들과 동화 속 삽화(揷畵)같은 풍광(風光)이 있었습니다. 그림 같은 길과 자동차가 있었고, 천사 같은 아이들의 웃음과 눈부신 미인들의 미소가 있었습니다.
새 달력을 마주하는 제 마음은 여전히, 공책을 새로 장만한 어린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스토리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면서 마음의 행로(行路)를 다잡게 됩니다. '올해는 내가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지'. 그런데 이 생각 끝에 왜, 갑자기 제 어린 시절 바람벽에 붙어있던 그 달력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국회의원의 사진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달력이었습니다. 열두 달이 한 장 안에 다 들어있었지요. 일 년 내내 한 사람 얼굴만 쳐다봐야 하는 단점은 있었지만, 궁핍한 시절 그 달력 한 장은 참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제작 의도가 그리 순수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것에 관한 오늘의 제 기억은 퍽 긍정적입니다.
정치가가 자신이 짊어지려는 세월과 자신의 얼굴을 일대일(一對一)로 나란히 놓는다는 것은 역사 앞에 명예를 걸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 태도의 주인공이라면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간판에 넣은 설렁탕집 할머니처럼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과 '국가와 국민의 시간'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자각(自覺)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 땅에서 지도자가 되고 싶고 '리더'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그런 달력을 '만들어 갖기'를 권하고 싶어집니다. 많이 찍을 필요도 없습니다. 열 장쯤만 인쇄해서, 집과 사무실 방마다 붙여두었으면 합니다. 정치가의 얼굴은 곧 '시간의 얼굴'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문짝만하면 좋겠습니다. 드나들 때마다 보고 또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정치가들이 많아지면 대한민국은 달력이 필요 없는 나라가 될지도 모릅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인데 달력 볼 일이 뭐 있겠습니까. 산중무력일(山中無曆日). 산속에 달력이 있을 이유가 없듯이.
윤제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