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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비파나무가 켜지는 여름/이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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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가 오면 손깍지를 끼고 걷자. 손가락 사이마다 배어드는 젖은 나무들. 우리가 가진 노랑을 다해 뒤섞인 가지들이 될 때,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열매를 깨뜨려 다른 살을 적시면 하나의 나무가 시작된다고. 그건 서로 손금을 겹쳐 본 사람들이 같은 꿈속을 여행하는 이유.

 깊게 뻗은 팔이 서서히 기울면 우리는 겉껍질을 부비며 공기 속으로 퍼지는 여름을 맡지. 나무 사이마다 환하게 떠오르는 진동들. 출렁이는 액과를 열어 무수히 흰 종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봐. 잎사귀들이 새로 돋은 앞니로 허공을 깨무는 동안.
 우리는 방금 돋아난 현악기가 되어 온통 곁을 비워 간다. 갈라진 손가락이 비로소 세계를 만지듯이 나무가 가지 사이를 비워 내는 결심. 서로가 가진 뼈를 다해 하나의 겹쳐진 씨앗을 이룰 때, 빛나는 노랑 속으로 우리가 맡겨 둔 계절이 도착하는 소리.

 ■참 아름다운 시다. 남쪽에 가면 비파나무가 자란다고 한다. 비파나무의 이파리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인데 가장자리는 톱니처럼 생겼다 한다. 꽃은 흰데 시월부터 십이월 사이에 피고, 열매는 노랗고 비파 모양인데 이듬해 여름에 맺힌단다. "우리가 가진 노랑"이나,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잎사귀들이 새로 돋은 앞니로 허공을 깨무는 동안", "빛나는 노랑 속으로 우리가 맡겨 둔 계절이 도착하는 소리" 등은 모두 비파나무의 잎과 열매에 대해 적은 것이다. 정성스럽게 적은 것이다. 간절하게 적은 것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건 서로 손금을 겹쳐 본 사람들이 같은 꿈속을 여행하는 이유"와 같을 만큼 애절하게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가지는 자라고 잎은 돋고 꽃은 피고 마침내 열매는 맺히는 것이다. 아니 아니 그보다 "나무가 가지 사이를 비워 내는 결심"으로 "온통 곁을 비워" 갈 때 그때에야 "씨앗"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갈라진 손가락"을 마주 잡고 "같은 꿈속을 여행"하고 그리고 결국에는 저 자신을 비워 내고 다시 비워 내는 것, 아마도 그런 것일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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