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앞에 누군가 있다 곰팡이처럼 얌전하게 접시에 앉아서 손을 흔든다 너무 커다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군체입니다 우리의 이름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르튼 숲으로만 불러 주세요 우리는 모두 죽었지만 이렇게 접시 위에 있겠습니다 아직 뜨겁습니다 한때 우리는 누군가의 시금치이자 케일이었습니다 훌륭하게 바스락거리는 잎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부글거리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멀고 먼 곳에서 모여든 숲
 합창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중력 앞에서 경건합니다 접시 위에 엎드린 우리를 보세요 우리는 선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앞에서 기도한다 자 이제 더욱 더 선량한 입김으로
 우리의 부러진 육체를 휘젓고 녹아내린 영혼을 씹어 삼켜 주세요 우리가 당신이 되겠으니 당신의 허기를 먹고 우리의 모든 맛으로 스미겠으니

AD

[오후 한詩]부르튼 숲/김건영
AD
원본보기 아이콘
 슬프고 섬뜩한 시다. 시금치나 케일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당장은 비록 샐러드나 스프가 되어 버렸지만, 그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던 시금치이자 케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름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시금치나 케일이 아니라 영철이나 동수나 혜지나 혹은 세라로 불렸을 것이다. "훌륭하게 바스락거리는 잎을 지니고 있었"던 그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접시 위에 엎"드려 있을 뿐이다. "중력 앞에서 경건"하게 말이다. 그리고 "너무 커다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씹어 삼"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 시금치나 케일 말고 그 자리에 영철이나 동수나 혜지나 세라를 적어 보자. 그리고 다시 읽어 보자. 이 시가 얼마나 끔찍한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가득한지, 얼마나 분노로 들끓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김건영은 얼마 전에 등단한 젊은 시인이고, 이 시는 등단작들 중 하나다. 그래서 나는 과감하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이제 진짜 젊은 시인들이 이 무참하고 비정한 세계를 향해 "부르튼"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그들을 두려워하라고.
 채상우 시인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