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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평상과 함민복의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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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시 읽기의 즐거움' - 마음 맞는 것이 함께 거문고를 켜는 것과 같으니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두 개의 상이 차려졌다. 하나는 정약용의 돌평상이고 하나는 함민복의 밥상이다. 돌평상은 최근 발견된 정약용의 시 10편 중의 하나에 들어있는 구절이다. 우선 시를 펴놓자.

송단백석상(松壇白石牀)
시아탄금처(是我彈琴處)
산객괘금귀(山客掛琴歸)
풍래시자어(風來時自語)

소나무 단에 하얀 돌 평상
바로 나의 거문고 타는 곳
산객이 거문고 걸어두고 돌아가면
바람이 불면 절로 소리를 내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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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쉬운 말로 되어 있는 시이지만, 시격(詩格)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나는 저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시의 백미는 물론 '풍래시자어'이지만, 시안(詩眼)은 아(我)와 객(客)에 있다. 번역문처럼 '나'와 '산객'이 따로 놀면, 시의 흥은 절반이 사라진다. 나와 객은 같은 사람이다. 앞 2행은 내가 주인이고, 뒤 2행에선 내가 객이 된다. 내가 차지하고 있을 동안은 거문고는 내가 타는 것이지만, 내가 사라지면 바람이 와서 탄다. 내가 사라지고 바람이 그 대신에 와 앉는 이 맛이 읽혀져야 시의 맛을 제대로 보는 게 아닌가 한다.
소나무 제단에 흰 돌평상
바로 거문고를 타는 곳
내가 거문고를 걸어두고 돌아가면
바람이 와서 (거문고가) 때로 스스로 우네.

제단의 돌평상이면 신성한 곳일 것 같은데, 정약용은 그런 곳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우상을 배격하고 이성과 실용을 강조하던 학자다운 면모이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단의 평상에 앉아 거문고를 타는 모습, 굳이 고사머리가 아니라 음악을 천상에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한 흥취마저 있다. 제단이 굳이 인간의 욕망을 담는 신앙의 흔적이라면, 거문고는 그걸 툭 털어버리는 자연스러운 신명이다. 내가 그걸 걸어놓고 가면 바람이 연주함으로써, 나와 바람은 한 풍류에 놓이며, 번갈아 앉는 두 연주자다. 마지막 행에서 '바람이 불면'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풍래시(風來時)로 끊어 읽어야 할 게 아니라, 2-3의 주조를 생각하면, 풍래(風來)- 시자어(時自語)(바람이 와서 때로 스스로 우네)로 읽는 게 옳아 보인다.

이번엔 함민복의 밥상을 들어보자. '부부'라는 시다.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된다
걸음을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함민복시인

함민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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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에서 문제의 핵심을 집어내는 함민복의 눈은 늘 놀랍고, 그 순후한 표현들은 웃음을 머금게 한다. 문태준은 이 시를 이렇게 읽는다. "한 순간에 십리 백리를 줄달음치는 마음과 또 그런 마음이 만나 살림을 차리는 일은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가. 마음 맞는 것이 거문고를 켜는 것과 같다 했으니, 함께 거문고를 켜듯 화락하시라."

정약용에도 거문고가 나오더니 여기도 거문고다. 앞에선 바람과 번갈아 거문고를 켰는데, 이제 부부가 함께 거문고를 켜는 듯, 긴 밥상을 들고 다니는 풍경이 등장한다. 밥상의 앞과 뒤에서 맞추는 마음의 화음. 새삼, 사는 일이 정겹게도 느껴진다. 두 개의 상 위에 차려진 두 개의 거문고 소리. 어떠셨는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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