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융합도 진부한 단어다. 학문과 학문, 산업과 산업, 기업들의 전문 영역, 민간과 정부의 역할을 서서히 희미하게 만드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전문기업은 점차 사라지고 구글과 같이 가장 빠른 혁신의 수단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진입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비영리 민간재단인 하워드휴즈 재단은 정부보다 오랜 20년 이상의 기초연구 분야 장기 지원을 통해 다수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각 분야에서 글로벌 플레이어로 등장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혁신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기업들이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안전한 시장을 대상으로 기술을 개발한다. 남들이 개발하니 우리도 개발해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혁신의 강박증이다. 그러나 사실 혁신의 강박증은 베스트 패스트 팔로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스트레스이자 2위라도 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성공요인 중 하나다.
2014년 9월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현금보유량이 GDP 34% 수준인 4400억달러로 지나친 현금보유가 경제의 활력을 잃게 하는 케인즈의 '절약의 패러독스(paradox of thrift)'에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 최근 우리나라 기업들이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차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이미 글로벌 정보통신 기업들은 우주선 발사체 재활용 기술 경쟁을 벌이는 등 지구를 넘어 미래 우주 선점을 위한 연구개발을 경쟁하고 있다.
국가와 시대를 막론하고 혁신의 주체는 기업이다. 현재 많은 과학기술 관련 기관에서 앞으로의 과학기술 50년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 50년과 같이 기업들도 정부 및 공공주체와 함께 빅블러, 빅뱅파괴 시대에 대비하는 정책 마련에 보다 관심을 갖고 함께 해야 대한민국과 기업들이 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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