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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희의 전시포커스]목탄으로 그린 남아공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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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켄트리지, 국내 첫 개인전

'망명중인 펠릭스' 1994년작, 종이에 목탄과 파스텔, '소호와 펠릭스' 연작 중 한 장면

'망명중인 펠릭스' 1994년작, 종이에 목탄과 파스텔, '소호와 펠릭스' 연작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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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와 펠릭스' 한 장면

'소호와 펠릭스'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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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남자의 작은 방. 세면대와 수세식 변기, 침대가 한 공간 안에 있다. 세면대 위 거울을 보는 남자 앞에 여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둡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의 방에는 물이 차오른다. 남자는 파리로 망명해 간 펠릭스, 여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토지 측량사 난디다. 난디는 펠릭스의 연인이자 또 다른 자아다. 방에 차오른 물은 고향에서 벌어진 기억이자,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같다. 어느 순간 배경은 그의 방에서 남아공의 한 폐허로 옮겨간다.

이처럼 묵직한 애니메이션이 있을까. 황량하며, 슬픔으로 충만했다. 원고나 스토리보드는 없다. 작가가 그렸다 지우고 또 새롭게 그려 나간 이미지와 장면들, 드로잉을 겹치고 겹쳐 형상화한 영상이다. 강렬하다. 드로잉의 주재료인 목탄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진지하고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 작품은 윌리엄 켄트리지(60ㆍ남아프리카공화국)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소호와 펠릭스' 연작이다. 백인 자본가이자 부동산개발업자인 소호와 그의 부인 난디, 그리고 그녀의 연인인 시인 펠릭스 등 인물 세 명을 중심으로 남아공의 사회와 풍경,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뇌를 드러낸다.

켄트리지는 1994년에 이 작품을 만들었다. 남아공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진 해다. 그 해에 넬슨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ㆍ흑백 인종분리정책)는 끝났다. 작가는 "선거가 있기 직전까지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정치 분파끼리 다투며 무고한 이들이 수십만 명이나 죽었다. 작품은 기억과 땅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은 사라졌고, 사람 시체는 땅에 흡수됐다"고 했다.

윌리엄 켄트리지

윌리엄 켄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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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리지의 국내 첫 개인전이 지난 1일 개막했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3,4 전시실과 복도가 그의 드로잉, 페인팅, 영상, 설치, 조각, 판화, 소규모 극장 등 광범위한 예술작품으로 가득 찼다. 미술과 함께 음악과 배우들의 움직임, 기계의 활용, 실루엣, 비디오 등이 결합된 동적인 작품도 여럿 눈에 띈다.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망라한 작품 108점이다. 전시를 앞두고 분주한 그를 지난달 31일과 개막일에 만났다.
작가의 표정은 작품의 분위기와 달리 꽤 밝았다. 그는 전시장을 함께 둘러보며 작품의 배치를 살폈고, 작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사회, 역사적 맥락이 담긴 작품들에 대해 그는 "남아공의 정치적 상황, 부조리와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며 "그런 요소들은 목탄 애니메이션의 영감이 됐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살면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한 일기와도 같다"고 했다.

전시장에 나와 있는 대형 드로잉 '사랑이 충만한 캐스피어'(1989년작), 키네틱 조각과 음악, 기계장치가 어우러진 일종의 미니어처 극장으로 제작한 '블랙박스'(2005) 등은 모두 시대적 부조리와 맞닿아 있다. '캐스피어'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시된 남아공에서 반란군을 진압할 때 사용된 무장 장갑차를 뜻한다. 그림은 살해된 사람들의 얼굴이 쌓인 잔혹한 장면을 묘사한다. '블랙박스'는 남아공이 아닌 남서아프리카의 독일령 나미비아에서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일어난 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당시 독일군은 토착민 헤레로 족 수천 명을 죽였다. 20세기에 일어난 첫 번째 대학살을 무대 형식을 빌려 고발하는 듯, 해골과 사람의 얼굴이 교차한다.

미니어처 극장 작품 '블랙박스'의 한 장면, 2005년작

미니어처 극장 작품 '블랙박스'의 한 장면, 200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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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충만한 캐스피어' 1989년작

'사랑이 충만한 캐스피어' 1989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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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 독서'

'간접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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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트리지는 오래된 책의 페이지마다 그림을 그려 빠르게 책장을 넘길 때 움직이는 듯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플립 북(Flip book)' 형태의 작품도 여러 권 제작했다. '간접독서'(2013)란 플립 북에는 백과사전에 나무와 작가 자신의 생각에 잠긴 모습, 흑인 무용수가 수기 신호를 보내며 춤추는 장면을 빼곡히 담았다. 정지된 드로잉을 연결해 움직이는 영상을 만드는 그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의 출발을 "드로잉 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역사와 정치, 철학이 스며있는 작품이 완성되기 이전에, '드로잉'은 작가의 예술적 사고와 표현의 본질이다. 또한 이번 전시 제목 '주변적 고찰'은 하나의 주제가 드로잉으로부터 시작돼 음악, 공연으로까지 자유롭게 확장해 가는 켄트리지만의 생각의 흐름을 의미한다.

작가는 "전시는 스튜디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장이다. 바깥에 있는 세상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와 개인적인 것과 교감하면서 편집돼 다시 세상에 보내진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스튜디오를 "정신분석가의 방과 비슷하다"고 했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곳이란 뜻이다. 무의식적인 것들을 불러내 의식적인 상황으로 끌어오는 공간이다. 스튜디오 안에서 아무렇게나 찢은 종잇조각 여덟 장을 가지고 다양한 '말(馬)' 형상으로 조합해 보는 일, 쓸모없어진 거친 붓으로 수없이 나무를 그려보는 작업은 작가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연결된다. 그렇게 탄생한 예술작품을 두고 그는 "넓은 세상을 이해하는 은유"라고 정의했다.

켄트리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아파르트헤이트하의 인종차별과 폭력을 소재로 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국제 미술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국내에는 2000년 광주비엔날레와 2008년 서울 미디어시티, 페스티벌 봄 등을 통해 소개됐다. 요하네스버그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에서 정치학과 아프리카학, 요하네스버그 아트 파운데이션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프랑스 자끄 르 로크 국제연극학교에서 연극과 마임을 전공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극단에서 일했고, TV영상시리즈 아트 디렉터로도 활약해 왔다.

작가의 부모는 모두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한 백인 변호사였다. 유대인이었던 증조부가 남아공으로 이민해 정착했다. 그는 지난 1일 재일교포로서 디아스포라(Diasporaㆍ이주민)를 주제로 한 책을 많이 낸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64)가 진행한 '작가와의 대담'에 참석했다. 서 교수는 "재일조선인으로서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켄트리지 선생께 묻고 싶은 질문"이라고 했다.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내부자면서 외부자이기도 하다. 스튜디오가 어떻게 보면 나의 작은 고향이 된다. (4대에 걸쳐) 오랫동안 남아공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주민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한국에서 전시를 할 수 있고, 영국이나 브라질에서도 작품을 보여줄 수 있으니 요하네스버그에서 창작을 하고 일을 쫓아 밖으로 나간다고 할 수 있다. 나대신 작품들이 망명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전시는 내년 3월 27일까지. 02-3701-9500.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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