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만리]아, 사람냄새가 난다…달빛초가 하룻밤
과거와 현재를 만나는 순천 낙안읍성으로 떠나는 가을여행
낙안민속마을은 사람 냄새가 난다. 수백년 전 부터 지금까지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그런 곳이다. 불 밝힌 정겨운 돌담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멈춘듯 과거로 들어간다.
근대화 사업으로 초가지붕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우리 곁에서 사라진 옛 마을의 모습이다.
한가위를 앞두고 있는 이맘때면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고향 초가집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럴 때면 잠시 회색 빛 콘크리트 도심 속 세상과 인연을 끊어 두고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마을을 찾아 가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겠다.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안아 분지를 만드는 자리에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 역사 드라마의 촬영장을 찾은 것은 아닌지 잠시 착각하지만 이곳은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이다. 새로 지어 만든 초가마을이 아니라, 수백년 동안 같은 집, 같은 골목, 같은 마당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다. 바로 전남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사적 제 302호).
조선시대 읍성들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낙안읍성은 과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마을이다. 낙안읍성은 1397년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됐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였으나 조선 인조 때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허술한 담장 하나 보이지 않는 석성은 1.4㎞를 이어가며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인위적으로 옛 모습을 갖춘 민속촌이나 양반들의 기와 가옥은 전국에 여럿 있다. 하지만 초가집 노란 지붕으로 마을을 이룬 백성들의 터전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곳은 유일하다.
낙안면 충민길로 들어서자 운치 있는 초가지붕이 반긴다. 성곽을 따라 눈에 들어오는 읍성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들어선 듯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읍성에는 북쪽을 빼고 동ㆍ서ㆍ남쪽에 문이 있다. 동쪽에는 '즐거움이 넘쳐나는 누대'를 의미하는 낙풍루(樂豊樓), 남쪽에는 읍성 성문치고는 규모가 큰 쌍청루(雙淸樓)가 있다. 하지만 서문은 소실돼 사라졌다.
성문에 들어서 성곽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낙안읍성에서는 우선 성 위를 거닐어야 하기 때문이다. 폭 3∼4m, 길이 1천410m인 성벽을 돌면 멀리 산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고요한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서문 터에서 쌍청루로 이어지는 길은 최고의 전망대다. 성을 사이에 두고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안에 90여채, 성 밖엔 성곽에 바짝 붙어 40여채의 초가가 몰려 있다.
마당 한쪽을 지키고 있는 장독대와 강아지, 집 흙벽에 매달린 메주의 모습이 살갑다. 더러 주춧돌에 놓인 고무신이라도 보게 되는 날에는 금방이라도 안채에서 다듬이질 소리가 날 것 같다. 체온이 사라진 유적보다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 사는 냄새가 친숙하게 다가와 정겹다.
초가지붕들 사이로 돌담 골목이 요리조리 이어지고, 수령 300~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ㆍ팽나무ㆍ푸조나무들이 곳곳에 서서 볏짚 사이에서 살아온 주민들의 일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성곽을 한 바퀴 돌고나면 읍성 안으로 둘러볼 차례다. 초가집 사이 골목을 걸으면서 옛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가장 정겨운 공간은 부엌이다. 안채 옆 나무문을 열면 어느 집에서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부엌이 나타난다. 나무를 때는 아궁이며 부뚜막이 정겹다. 골목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 집으로 달려온 아이들에게 군것질 거리를 만들어 주었을 무쇠솥도 보인다.
관청 건물인 동헌과 내아, 타지에서 온 관리가 묵던 객사, 자료 전시관 등 볼거리가 많다. 민속장터와 기념품점, 짚풀 공예와 길쌈, 대장간 등 옛 모습을 추억하는 체험코스는 여행객을 더욱 즐겁게 한다.
주말에는 풍물 공연과 순라(巡邏) 교대 등의 행사가 벌어진다. 초가집에서 숙박하며 기억에 남을 만한 하룻밤을 보낼 수도 있다.
늦가을에 낙안읍성을 찾는다면 초가집 이엉을 엮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리 이엉을 엮어 두었다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을 택해 마을 사람들이 전부 품앗이를 통해 이엉을 올리는 모습은 정겨움을 넘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순천=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수도권이라면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가다 순천완주고속도로 황전IC를 나와 선암사길, 벌교, 낙안읍성 방면으로 가면 된다.
△볼거리=지나칠 수 없는 곳 중 하나가 순천만(사진)이다. 용산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부드럽게 휘어진 개펄의 물길이 장관이다. 최근 국가정원 1호로 지정된 순천만정원과 정원박람회장도 빼놓을 수 없다. 또 화포마을에서 보는 일출이나 와온해변의 일몰 풍경도 장관이다. 이밖에도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선암사(사진), 송광사를 잇는 조계산굴목이재도 걸어볼 만 하다.
△먹거리=낙안 땅에서 나오는 여덟 가지의 귀한 재료인 석이버섯, 고사리, 도라지, 더덕, 미나리, 무, 녹두묵, 붕어 등 여덟 가지 재료로 만들어지는 백반 음식이 팔진미다. 읍성을 찾은 이순신 장군을 대접했다고 전해진다. 상차림은 계절에 따라 여덟 재료가 달라진다. 읍성 내 장터와 주변 식당에서 가격에 비해 놀랍도록 푸짐한 백반을 내놓는다. 순천에는 맛집들이 많다. 그중 별미로 꼽히는 것이 짱뚱어탕. 대대포구에 식당이 여럿 있다. 선암사 부근의 진일기사식당(사진. 061-754-5320)은 백반정식이 맛깔스럽게 나온다. 송광사 인근의 길상식당(061-755-2173)도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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