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권총이다

나는 권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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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0년 8월 미국 텍사스 외곽 160마일 근방의 병기제조창 제 1라인에서 태어났다. 최종 검사를 마친 나는 곧바로 수송기에 실려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로 옮겨졌다. 이 나라는 한창 전쟁 중이었다. 나는 젊은 제임스 소위의 허리춤에 걸렸다. 그가 나의 첫 주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제임스는 북쪽으로 진격하다 적군의 포로가 됐다. 나의 주인은 반나절 동안 인민군 소좌였다가 인민군 사령관으로 바뀌었다. 며칠 후 나의 주인은 다시 국군 상사, 인민군 장교, 국군 중위, 죽창 들고 설치는 민간인, 반동분자 처벌에 광분하는 빨치산으로 차례차례 바뀌었다. 그러나 나의 주인이었던 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물론 그들로 인해 나도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다. 전쟁은 참혹했다.

빨치산을 끝으로 풀섶에 오랫동안 누워있던 나를 발견한 사람은 절름발이 농부였다. 그는 나를 창고에 숨겼다가 중년의 사내에게 돈을 받고 넘겼다. 그때부터 나는 전쟁과는 완연히 다른 세계를 전전하게 됐다. 새 주인은 지주였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즈음, 새 주인을 포함해 몇 사람을 더 죽인 나는 시골 마을의 풀숲에서 뒹굴다가 소녀의 손에 이끌려 엿장수에게 넘겨졌다.


그제야 나는 시골과는 모든 것이 비교되지 않는 도시로 진입했다. 양주, 양담배, 마약을 밀수하거나 미군의 군수품을 빼돌리면서 수시로 쇠파이프, 칼, 도끼를 들고 패싸움을 벌이는 패거리들 중 하나가 차례차례 나의 주인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주인이 바뀐다는 것은 이전 주인의 죽음을 의미했다. 나를 소유했던 그들의 죽음은 대체로 전격적이고 처참했다.

아주 오랫동안 금고에서 침묵의 세월을 보냈던 나는 거물 양공주를 거쳐(물론 그녀도 죽었다) 묵직한 목소리를 가진 권력자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그는 카리스마가 대단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의 직감 상 그 역시 나로 인해 죽게 될 것이 뻔했다.
한국에 온 지 어언 60년, 주인들은 내가 듣지도, 보지도,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은밀한 곳에서는 ‘야수와 같은 인간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줬다. 한낱 도구에 불과한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달리 외면할 방법은 없었다.


오늘 아침, 그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수많은 목숨을 빼앗았던 나의 운명도 드디어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과연, 권력자의 하수인에게 넘겨진 나는 배신과 반전에 반전을 거쳐 권력자, 양아치, 경찰이 뒤섞인 사투 끝에 하수인과 함께 깊은 강바닥으로 추락했다. 지옥 같은 세상을 벗어났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한없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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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엿장수에게 넘겨지기 전의 평화롭던 그 시골 마을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내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내가 있는 곳은 오히려 항상 지옥이었다. 그러나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없으면 사람들은 평화로울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한 마디 남기겠다. 혹시라도 풀섶에서 뒹구는 나를 보면 냅다 도망가라. 나는 그대들이 오해하는 ‘힘’이 아니다. 내가 굳이 필요치 않았던 사람들도 나를 갖는 순간 ‘욕망의 전차’에 올라 무모한 판단을 하나,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나는 그대들의 생각처럼 강한 존재가 아니라 두렵고 무서운 존재이다. 나는 권총이다. (나는 권총이다 / 오일구 지음 / 코치커뮤니케이션 펴냄 / 1만3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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