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생태계 깨진 자본시장 떠나는 기업들
기업 감시하되 시장친화적 관계 지속해야
투자자에 모든 정보 공개·공유 가능해져야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금융은 심리다. 그래서 신뢰가 생명이다. 신뢰가 무너진 자본시장은 영혼 없는 플레이어의 투기장과 같다. 이해 관계자 사이의 탄탄한 신뢰 구축은 자본시장을 움직이는 핵심이다. 신뢰가 없으면 생태계는 깨지고 만다."

국내 대형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는 금융과 신뢰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올해 국내 자본시장의 최대 화두는 '신뢰'다. 자본시장 참여자가 신뢰 회복을 외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사상 유례없는 초저금리 시대를 맞으면서 '경제의 혈관'인 금융과 기업의 자금 조달 창구인 자본시장의 역할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신뢰' 공식은 어긋난 지 오래다. 정보 비대칭에서 기인한 각종 사건사고가 시장의 신뢰를 잃게 한 주범으로 꼽힌다. 1999년 대우채 사태를 시작으로 최근의 동양 기업어음(CP) 사건까지 악몽 같은 기억만 뇌리에 남아 있는 게 현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본시장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 조달 창구로서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신뢰 생태계가 무너진 자본시장에서 기업이 떠난 결과다. 지난해 국내 민간기업이 증권시장에서 주식이나 회사채 발행을 통해 신규 조달한 자금은 10조8000여억원에 그쳤다. 2005년 25조50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규모다. 은행에서 빌린 돈은 75조9000억원으로 같은 기간 세 배 이상 늘었다.


기업이 자본시장을 외면하는 원인을 성장 우선주의 정책에서 찾는 전문가도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고위 관계자는 "성장을 위해서는 양보를 강요받고 기업 활성화를 위해서라면 경영 투명성이나 신뢰를 쌓을 만한 충분한 정보 제공은 무시당해 온 것이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금융위원회 자본시장 개혁 위한 정책 추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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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1995년 발간한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사회의 축적 자본 중 가장 중요한 자본은 '신뢰'라고 강조했다. 신뢰도가 높은 사회는 무한 성장 가능성이 있지만 저(低) 신뢰 사회는 거래비용의 증대로 성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시장에서 신뢰란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유하는 것을 뜻한다. 기업은 물론 투자자가 시장을 믿고 정상적인 판단 아래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부실 저축은행 사태가 터졌을 때 영업정지 직전 부산저축은행이 거액 자산가의 예금만 빼돌려 인출했던 사건은 두고두고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최악의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정보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상실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내부 정보를 악용한 작전 세력 등 불공정거래 행위는 시장의 신뢰를 저해하는 고질적 병폐다. 금융 당국은 시장을 인위적으로 움직이려는 세력에 의해 시장 왜곡현상이 벌어지지 않도록 감독·감시를 강화하고 있지만 근절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해선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 위원장은 "감시는 하되 기업 등 플레이어와 신뢰를 구축하는 시장친화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투자자에게 정확하고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면 정보 제공자인 기업의 협조가 절실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증권사와 투자은행(IB) 등 매도 부문(Sell side)에서 보면 당장 '눈앞의 수익'만 좇는 경쟁 구조도 시장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 중 하나다. 대형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신뢰와 결부한 무리한 마케팅에서부터 선취 수수료를 받는 펀드 상품을 선호하는 판매 주체나 '매수' 분석 보고서만 늘어놓은 증권사 리서치센터 등도 신뢰 구축의 장애물들이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자본시장은 투자자의 신뢰가 충분하지 않다면 돈의 주체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라며 "신뢰의 선순환 구도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장기투자 문화를 만들 수 있고 지속적인 기업의 자본 조달도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산운용사와 연기금 등이 매수자라는 갑의 위치를 이용한 이른바 '갑질'도 시장 신뢰를 저해하는 요소다. 채권파킹 같은 불법거래가 관행이란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었던 것도 펀드매니저들의 갑질이 가능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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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사들의 경우, 투자자라는 고객이 아닌 계열사에 종속된 구조도 신뢰 구축을 등한시 했던 요인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국내 대다수 운용사는 은행 지주사의 계열사로, 확고한 자산운용 철학을 갖기 어려운 구조인데다 펀드매니저의 잦은 교체도 신뢰 회복에는 걸림돌"이라고 했다.


올 초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의 취임사에서 "자본시장이 신뢰를 회복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말한 것은 더 이상 신뢰를 쌓지 않고서는 업계 발전도 어렵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업체들도 과거 회사 수익을 최우선시 하던 것에서 벗어나 고객 수익률을 우선으로 하는 쪽으로 조직 내부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 하나대투증권 등이 수수료 수익이 아니라 고객 수익률로 직원을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혜원 기자 kimhy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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