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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진정 '아쿠에르도 나티오날'이 필요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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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마치고 오늘 돌아왔다. 긴 여정이었다. 12일간의 짧지 않은 일정, 또는 지구 반대편을 오가는 물리적 거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가 떠난 뒤 나라 안은 '성완종 파문'으로 소용돌이쳤다. 급기야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던 국무총리가 부패 의혹의 화살을 맞고 추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부재한 비상한 국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길고도 불안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국정공백의 불안은 예고돼 있었다. 박 대통령은 순방길에 오르며 직무를 대행해야 할 국무총리 대신 여당의 대표를 불렀다. 외면당한 총리는 물러나겠다는 뜻을 먼 곳의 대통령에게 전했다. 잉카의 전설이 떠도는 나라에 새벽이 열리는 시각이었다. "안타깝다"는 한 마디로 63일 초단명 총리의 역할은 끝났다. 나라 밖에서 나라 안의 긴박한 상황을 지켜보는 박 대통령의 시간은 무겁고도 길었을 게 분명하다.
돌아보면 중남미 순방은 의미가 적지 않았다. 중남미는 떠오르는 신흥시장이자 환태평양 경제권을 묶는 축의 하나다. 역대 최대 규모인 125개 기업이 경제사절단으로 참여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페루에서는 두 나라가 공동생산한 한국훈련기(KT-1P) 1호기의 출고 기념식이 열렸고, 칠레와 브라질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여성 대통령을 만나는 보기 드문 장면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은 내내 뉴스의 초점에서 비켜나 있었다. '내치는 고전하지만 외치는 잘한다'는 과거의 평가는 빛을 바랬다. 성완종 파문은 모든 것의 블랙홀이 됐다.

그렇게 끝이 난 중남미 순방이지만, 나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낯선 스페인어 한 구절 '아쿠에르도 나티오날'이 그것이다. 한ㆍ페루 비지니스 포럼에서 박 대통령은 "오늘날 페루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원동력은 아쿠에르도 나티오날(Acuerdo Nacional) 정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 국가 차원에서 대화와 설득, 합의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원칙'이 아쿠에르도 나티오날 정신이라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페루가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국가적 합의 기구로 아쿠에르도 나티오날을 만든 것은 정권 교체기인 2002년. 기구는 민주ㆍ법치, 평등ㆍ사회정의, 국가경쟁력, 효율ㆍ투명ㆍ분권의 4가지를 국가 정책목표로 내걸었다. 재미 있는 것은 기구 내에 거창한 목표 뿐 아니라 '모두가 페루' '우리는 페루' '언제나 페루'와 같은 국가 정체성과 일체감을 강조하는 소규모 포럼이 많다는 점이다.

대화, 설득, 합의! 정작 이 같은 단어가 필요한 곳은 우리나라가 아닌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나라. 그 것도 모자라 지역으로 쪼개진 나라. 국가적 비극인 세월호 참사를 놓고도 갈등하는 나라, 대타협이라 이름붙인 기구가 끝없이 표류하는 나라, 소통의 리더십에 목마른 나라.

대화와 설득과 합의의 덕목이 작동되지 않는 나라의 대통령이 타국의 국가적 합의 정신을 성장의 원동력으로 정의하고, 칭송하는 모습은 몹시도 어색해 보였다. 대화와 설득의 요체는 소통이다. 취임 이후 줄곳 박 대통령을 따라다닌 비판의 단어가 '불통' 아니었나. 박 대통령이 아쿠에르도 나티오날을 격찬한 것만큼이나 그런 시스템에서 느낀 것이 많다면, 중남미 순방에서 거둔 망외의 소득이 아닐까 싶다.

기내 기자 간담회도 생략한 채 무겁게 귀국한 박 대통령이 직면한 국내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복잡하다. 성완종 의혹의 파장은 진행형이다. 당장 이완구 총리의 후임을 골라야 한다. 4대 개혁은 기로에 섰다. 넓게는 박근혜정부의 성패를 가름할 후반부 국정운영의 리더십을 새로 세워야 할 시점이다. 진정 아쿠에드로 나티오날의 정신이 필요한 것은 난제 앞에 선 박 대통령과 이 나라가 아닐까.






박명훈 주필 pmho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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