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긴급조치' 판결에 담긴 정치화법
'위헌'인 긴급조치, 면죄부 판결은 자기모순…"대법원 스스로 고도의 정치적 판단"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주먹으로 턱을 친 것은 불법이지만, (턱을 치려고) 주먹을 뻗은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는 얘기 아닌가.”
30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 '긴급조치'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 현장.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긴급조치를 대통령이 발령한 행위는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긴급조치를 둘러싼 최근 대법원 판단은 논란의 대상이다. 자기모순과 같은 판단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발령된 긴급조치를 ‘위헌’으로 판단한 주체는 다름 아닌 대법원이다. 헌법재판소도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대법원은 2013년 4월18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긴급조치 9호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 것으로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도 위반돼 무효다”라고 판시했다.
민변 긴급조치 변호인단, 긴급조치피해자대책위 등 시민단체들은 30일 오후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에 대한 대법원 판단은 면죄부 판결이라면서 비판했다.
대법원 판결 중에서도 전원합의체 판결은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 긴급조치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으면서 피해자들의 법적인 구제가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하급심에서는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연이어 내놓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판단이 달랐다.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권순일)는 지난 26일 최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상고심에서 “최씨에게 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
최씨는 1978년 서울대 재학 중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영장 없이 20여일 동안 구금됐다. 최씨는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를 봤다. 최씨는 대통령과 공무원의 불법 행위로 고통을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항소심 재판부는 최씨에 대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국가긴급권의 행사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하여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긴급조치 피해자를 포함해 법조계 안팎에서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을 ‘궤변’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30일 오후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그러한 지적이 이어졌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긴급조치 변호단, 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 4·9 통일평화재단, 포럼 진실과 정의,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한국전쟁유족회, 역사정의실천연대 등이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긴급조치 1호 피해자였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긴급조치 1호로 잡혀갔는데 군사법원에서 1심과 2심을 이틀 만에 끝냈다. 대법원도 고등군법회의 그대로 형을 선고했다”면서 “대법원의 행동은(위헌 결정이 났던 긴급조치에 면죄부를 준 것은) 인류문명에 대한 반란”이라고 비판했다.
한상희 교수는 “법리와 정의를 왜곡하고 역사를 권위주의 시절로 되돌려 놓은 대법원의 판단”이라며 “대법원 스스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했다”고 비판했다.
이날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대법원의 구성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변 긴급조치 변호인단의 조영선 변호사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면 사법부까지 장악할 수 있는 현행 법원조직법 및 대법원 규칙 개정을 통해서라도 사법부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인권의 보루로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의무를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긴급조치가 위헌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화해의 정신으로 공동체 기초를 다시 놓은 그 때의 정신을 되살려 놓아야 한다.…인권 범죄에 대한 국제 규범 시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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