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3월의 6ㆍ25전쟁영웅'에 한정일 경감, '3월의 독립운동가'에 박인호선생, '3월의 호국인물'에 서일 선생이 각각 선정됐다.
국가보훈처은27일 6ㆍ25전쟁 당시 곡성경찰서장으로재직 중 곡성전투경찰대를 편성해 북한군과 유격전을 펼치는 등의 전공을 세운 한정일 경감을 '3월의 6ㆍ25전쟁영웅'으로, 3ㆍ1운동을 배후에서 이끈 박인호(1854∼1940)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 서장은 매복 작전을 펼쳐 북한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북한군 3개 중대를 상대로 벌인 치열한 전투 끝에 52명을 사살했다. 타격을 입은 북한군이 다시압록교를 넘기까지는 일주일이 더 필요했다. 8월 6일 새벽 북한군 1개 연대의 기습 반격으로 태안사에서 48명의 경찰관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다치는 피해를 봤다. 전남 광양 백운산으로 철수한 한정일 서장은 다시 잔여 대원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북한군의 보급로를 기습하는 등 유격전을 지속해 북한군에게 타격을 가했다.
'3월의 독립운동가' 박인호(1854∼1940) 선생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883년 동학에 입도해 1894년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08년 천도교 대도주에 임명된 후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했다. 1919년 천도교 전국 대교구에 등사 인쇄기를 배치토록 해 독립선언서 제작을 지원했다.
전쟁기념관이 선정한 '3월의 호국인물' 서일 총재는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1910년 동만주로 망명해 청일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 한인 자녀를 교육했다. 대종교에 입교해 만주로 들어오는 망명 의병을규합해 독립군인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18년 만주와 러시아령에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전쟁으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취지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듬해 중광단을 정의단으로 개편하고 체코군의 도움으로 무기를 구입해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이후 정의단을 무장독립군단을 보유한 항일단체이자 북간도 전 지역을 행정구역으로 삼는 행정부를 겸비한 군정부로 재편성했다.
군사훈련과 무기구입 등의 활동을 벌이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해 군정부를 대한군정서로 개칭하면서 총재에 취임했다. 1920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군, 안무군, 광복단 등의 여러 부대를 통합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가 됐다. 1921년 8월 수백 명의 도적에게 야습을 받고 다음날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해 자결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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