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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습격]헛개나무(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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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나무도 서럽고
개나무도 억울한데,
그 둘이 다 붙었으니
흔하고 보잘 것 없다는 비웃음이
이름에 가득하구나, 헛개나무야

10년전쯤 암에 걸려 위를 다 잘라내고 창자로 버티며 살아온 상만이 종형은 집안 결혼식에서 만난 내게 쫑쫑 잘라놓은 헛개 마른 가지를 건넸다. "술 많이 먹고 스트레스 받고 피곤한 데 좋다더라, 이거 내가 강원도 깊은 산골을 헤매면서 채취한 것이라 깨끗하고 좋은 거야. 달여서 먹어보렴."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형은, 암 환자가 된 뒤로 일을 형수에게 맡기고 등산을 시작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배낭을 매고 혼자 떠나는 그 여행에서 수많은 버섯을 캐와서 건강식으로 먹었다. 산에서 흘린 땀과 산이 내놓은 음식들이 도와준 탓인지, 중간중간 고비는 있었지만, 건강을 잘 유지해왔다. 해마다 벌초 때에야 한번쯤 만나는 대소가 친척인지라 결혼 행사 자리에서 몇 마디 안부 나누고 나면 금방 데면데면해지는 그 형이 문득 내놓은 헛개나무는, 어쩐지 각별했다.

보름쯤 되었을까. 헛개나무에 감초를 아주 살짝 넣어 부드럽게 한 헛개수를 아내는 작은 물병에 한통씩 얼려서 출근길 백팩 속에 넣어주었다. 그것을 마시기 시작한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상당한 강도의 폭탄주 잔치로 내로라 하는 술꾼 데스크들이 다 나가떨어진 술자리 이후에도 멀쩡하게 출근하게 된 것이다. 술도 덜 취하고 취한 뒤에도 빠르게 깬다. 몇 잔만 마시면 위장이 경련을 일으키던나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신기하여 인터넷을 찾아보니, 헛개수가 술을 물로 만드는 신비한 효능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피로를 풀어주고 갈증도 해결해주며, 간과 위장에 좋고 변비에도 효험이 있다고 한다. 요즘은 헛개수를 믿고 술자리에서도 겁을 상실할 지경이 되었으니 이런 오버를 경계해야할 판이다. ㅎㅎ. 이게 없으면 어떻게 버틸까를 생각하며 '재어놓은 총알' 세어보듯,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상만이 형 주신 그 나무, 아직 많이 남아 있소?" "이제 다 먹어가는데요." "한번씩 끓이고는 버리오?" "당연하죠, 그렇게 우려냈는데 또 그걸 다시 끓인단 말이예요?" "이런...!"

다시 인터넷을 뒤져본다. 헛개수 재탕 삼탕이 되는지...어딘가에 보니, 삼탕까지 끓여도 되며, 처음 끓인 것과 섞어먹는 것도 방법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새삼 버린 것들이 아까워지기 시작한다. 아내에게 그 글을 보여줬더니, "아휴, 헛개수 신도가 되셨구려. 그거 없으면 다시 사거나 하면 되지, 뭘 그리 아까워한단 말이오?"라며 되레 핀잔이다.
내 인생을 불콰하게 어지럽혀온 평생의 음주콤플렉스를 떨치게 해준 이 기적의 음료에 대해 아직 공감대가 덜 형성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술 마신 허깨비로 무시로 지갑 잃고 길 잃고, 세상에 대한 분별과 판단조차 잃어가며 수시로 난감한 인생을 살아온 빈섬에게, 이 허깨비 사촌같은 넥타를 내려주시는 헛개야. 왜 이제야 나타났니,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드라이브 좀 말짱하게 운전하게 해다오.


'낱말의 습격' 처음부터 다시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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