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와 을지로 세운상가에서 산 해적판(백판이라고 불렀다) LP를 한장에 500원씩 주고 사서 전축 위에 올렸다. CCR의 '헤이 투나잇‘ ’모리나‘’프라우드 매리‘, 톰 존스의 ’킵온러닝‘이 강촌의 풀밭과 대성리의 모래밭을 춤추게 했다. 지직거리는 잡음을 함께 들으며 일부러 찢은 교모를 눌러쓰고 나팔바지로 만든 교련복 끝자락을 펄럭이며 정말 끝도 없이 흔들었다.
‘고고’는 60년대초 뉴욕의 ‘위스키아 고고(Whiskya Gogo)’라는 술집 이름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 뜻은 ’한잔 먹고 시작하자‘쯤 된다. 이곳에서 노래하던 자니 리버스라는 가수가 세계에 전파시킨 흥겨운 록앤롤풍 음악은, 이 땅의 70년대를 뒤흔든다. 고고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것은 65년이었지만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69년 여름 그룹사운드 콘테스트가 시작되면서이다. 스텝이 따로 없는 쉬운 춤이라 10대들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특히 파트너가 필요없다는 이유 때문에 처음엔 ’건전한 춤‘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한곡 추는데 1000여번의 몸동작을 반복해야 하기에 거의 ’운동‘에 가까웠지만 힘겨워하기는 커녕 신나게들 추었다.
71년 서울에는 호텔내 고고클럽이 10여곳 있었다. 저녁답부터 이튿날 통금이 끝나는 새벽4시까지 철야를 하는 곳도 3곳이 있었다. 새벽이 되면 춤추다 지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서로 기대며 통금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새벽 4시. 호텔 앞이 북적거리고 택시들은 이들을 청진동 해장국집이나 마포 설렁탕집으로 실어나른다. 72년 10월 서울시는 이 춤을 ‘퇴폐’로 규정짓고 금지령을 내린다. 이듬해 겨울엔 고고파티를 벌이던 대학생 71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밤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댕댕 울린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들은 숨어서 흔들며 밤을 샜다. 화신백화점 뒤의 학원골목과 서린동, 관수동, 무교동, 명동, 로열호텔 주변은 당시 청소년 우범지역으로 꼽혔다.
이 고고열병을 돈벌이로 활용하고자 하는 상혼도 기승을 부렸다. 77년 5월 명동에 있는 다방 10여곳은 ‘초저녁고고’ 라는 간판을 내걸어 물의를 일으켰다. 10대들을 겨냥해 고고장 변태영업을 하는 다방이었다. 81년 광희동의 한 고고클럽은 손님 136명 전원이 미성년자로 밝혀져 분노를 자아냈다. 당국은 고고광풍을 잠재우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뜻밖에도 78년 존 트래볼타가 그 일을 해냈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와 ‘그리스’는 순식간에 고고클럽을 디스코데크로 바꿔놓았다. 하얀 바지에 T셔츠를 입고 격렬하게 뒤트는 디스코는 10년의 고고판을 갈아치운다. 고고도 가고 디스코도 간 지금, 가무민족의 춤바람이 통째로 식었는지, 번성하던 노래방도 시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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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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