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안 읽는 것, 책을 안 사보는 것, 책이 흥미롭지 않은 것, 서점이나 도서관이 매력을 잃어가는 것. 이건 분명히 놀랍고 끔찍한 일이다. 많은 옛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얻은 소프트웨어를 우리들을 위해 그 속에 넣어놓아 시간을 뛰어넘는 소통으로 삼고자 했다. 또한 동시대의 지식과 지혜들도 책을 통해 넓고 깊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책장을 넘겨야 할 사람들이 도무지 이쪽에 관심과 흥미가 없거나 제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것들을 사 볼 의사가 없으니, 이건 인류가 퇴락하고 정신문명이 망쪼가 되는 일임에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2천년 문명사의 기틀을 이루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1천년 지식의 보고였다 하더라도, 그래서 인간이 '문(文)'에 경배하는 '문명'과 '문화'를 일궈왔다 하더라도, 생산과 소비가 쿵짝이 맞는 '거래'였기 때문에 번성이 가능했다는 사실에는 이의를 달기 어렵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것이라고 외쳐도 독자가 딴 곳을 보고 있으면 말짱 황이다. 이를테면 책읽기는 소통의 한 방식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책이 죽은 것은 독자의 탓이 아니고 이 시대의 정신이 몰락했기 때문도 아니다. 출판사가 장사를 못한 탓은 더더욱 아니고, 책 내는 사람이 형편없는 쓰레기 콘텐츠들만 내기 때문은 더더더욱 아니고, 세상이 경박해졌기 때문도 아니다. 책이 소통의 중심에 서있기에 부적절해졌기 때문이라고 정직하게 인정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은 '권위'나 '당위'에 의지해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매력과 관심이 없다면 천년의 소통도 한 순간에 죽을 수 밖에 없다. 바쁘시다는데야, 그래서 안 읽겠다는데야 도리 없지 않은가. 전두환이 다시 돌아와 '삼책교육대'를 만든다 해도 그들을 열독자와 애독자로 만들 순 없다. 이렇게 말하긴 쉽지만 책의 신화를 믿는 많은 이들을, 이런 잔인한 말들로 설득할 순 없다. 그렇다고 책이 이제 모두 사라진단 말인가. 이 많은 책들이 해오던 역할과 공헌을 무엇이 대치하고 대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흐름이 옳지 않으면 모두가 정신을 차려 흐름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하지만, 책이 사라지지 않고 책 문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이 지금이나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가까운 미래에도 존속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생각일지 모른다. 책의 존재 방식과 소통 방식이, 그 실지(失地)를 조금이라도 되찾기 위해 천년의 관행까지도 대수술하는 자기혁신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다.
책 안 읽는, 스마트한 무뇌사회가 도래하고 있다고 섣불리 개탄을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밥줄로 얽힌 이들이 지르는 비명까지 말릴 순 없다. 나 또한 책을 몇 권 내봤지만, 따박따박 인세가 들어오는 부자가 되는 꿈은 접은지 오래됐다. 물론 끝없이 가볍고 쉬운 읽을거리로 옮겨가는 독자를 원망할 생각도 없다. 인간은 필요한 것들과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잘 조합해 무독서 사회의 영혼을 업그레이드할 것이다. 지난 천년의 인간과 다음 천년의 인간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좀 더 심호흡을 하고 급변하는 소통세태를 읽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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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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